-글빵연구소 졸업작품 퇴고본
그날 아침 출근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하나의 의식처럼 커피 몇 모금을 조용히 홀짝였다. 나만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출근시간은 이미 카운트되고 있었다. 까만색 플라스틱 다회용 컵을 가방에서 꺼내, 마시던 커피를 옮겨 담았다.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가수 한올의 《모두 행복해져라》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두 행복해져라.
모두 이루어져라.
나를 아는 사람들, 모두 다
하는 일 모두, 큰 탈 없이
모두 행복해져라.
업무 시작 전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근무 시작을 알리는 노동요였다.
대용량 텀블러에 커피를 담으며 인사를 나누던 직원들이 노랫소리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나도 파블로프의 개가 반사적으로 침을 흘리듯, 얼른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음악이 멈추자 나는 눈동자를 재빨리 움직여 정보를 흡수하고 업무에 속도를 냈다. 타닥이는 키보드 리듬과 높은 톤의 통화 음성이 뒤엉켜 지루한 협주곡이 만들어졌다.
‘탁, 드르르르르- 위잉, 치직, 추르르르’
순간 반복되는 리듬을 깨트리는 커피머신의 소리가 들려왔고, 알싸하고 고소한 커피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나는 이끌리듯 책상 위에 놓인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따뜻하고 고소했던 라떼는 플라스틱 컵에서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탕비실로 가서 얼음을 한가득 담아 벌컥벌컥 마시고 자리로 돌아왔다. 손가락은 또다시 키보드의 리듬을 만들어 무심히 연주에 동참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 동료들의 가방을 싸는 부스럭거림과 컵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일 업무 보고의 메신저 알림이 눈치 게임처럼 줄지어 올라오며 퇴근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깨 위에 내려앉은 피로를 느끼며 엘리베이터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26, 25, 24... 낮아지는 층수처럼 내 기분도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내가 마치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부속품 중 하나인 것만 같았다.
터벅터벅 걸으며 바닥에 그려진 규칙 없는 균열을 바라보았다. 균열이 생긴 바닥처럼 매일 똑같은 나의 일상에도 어떠한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문득 스치는 생각에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출근 30분 전 회사 근처 단골 카페의 키오스크 앞에 서서 늘 그랬듯 카페라떼 메뉴를 선택해 결제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주문하신 카페라떼 나왔습니다"
늘 듣던 목소리가 아닌 저음의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또 아르바이트생이 바뀌었나?' 생각하며 라떼를 받아 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돌이켜보니 카페에서 1년 동안 두 명의 아르바이트생을 만났다.
처음으로 마주친 사람은 텐션이 남다른 남자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침에 덜 깨어있던 나의 뇌 한켠에 산소를 불어넣어 번뜩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단 몇 마디의 인사가 하루를 생동감으로 바꿔주었던 것이다. 텐션을 끌어올린 밝고 우렁찬 음성이 주는 힘은 생각보다 컸다. 키가 크고 씩씩한 청년은 자신의 이미지를 닮은 하늘색의 키 큰 머그컵에 커피를 내어 주었다. 그 커피를 받아 들면 내 마음도 맑은 하늘처럼 환해지는 듯했다.
또 어느 날은, 씩씩한 그를 대신해 새로운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카페를 지키고 있었다.
‘딸랑’ 문이 열리자, 눈을 마주치며 달콤하게 미소 짓더니 “어서 오세요” 하고 부드럽게 인사했다. 그 인사는 하루의 시작을 포근하게 여는 주문과도 같았다. 그녀는 동글동글하고 사랑스러운 핑크색 잔에 커피를 담아 주었다. 날이 서 있던 마음도 부드러운 실루엣의 커피잔처럼 조금씩 둥글둥글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두 아르바이트생 대신 커피를 내어준 낯선 남자는 알고 보니 카페 사장님이었다.
그가 내려준 커피는 적당한 길이의 투명한 유리잔에 담겨 있었다. 사장님의 손길이었을까. 카페는 먼지 쌓인 조화를 걷어내고 묵은 얼룩까지 닦아내었는지 투명한 커피잔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투명한 유리 안에서는 하얀 우유와 짙은 에스프레소가 서로를 끌어안아 오묘한 갈색빛으로 변해갔다. 커피는 하나의 색이 아닌 많은 색들을 품고 있었다. 막이 걷히고 안에 담긴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투명한 시선을 갖게 된 것만 같았다.
커피를 내리는 사람과 내어준 커피잔은 서로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내게 영향을 주었는지 하루의 결을 바꾸어 놓었다.
집으로 돌아와 신중하게 커피잔을 골랐다. 아무 무늬가 없는 하얀 머그잔을 선택해 머신에 놓고 추출 버튼을 눌렀다. 커피 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내가 선택한 하얀색 잔이 오늘 하루를 깨끗하게 마무리해 주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렇게 선택된 모든 순간들이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지나치듯 흘려보냈던 순간들도 멈춰보니 하나같이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점과 점이 모여 선을 이루고, 선과 선이 모여 면이 되듯 이런 사소한 일상들이 모여 하루를 그려내고 있었다. 나도 매 순간 ‘나’라는 흔적을 잔에 담아 누군가에게 건네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결코 기계 부속품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머그잔에 입술을 대고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음미했다. 오늘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기분이 들었다. 같은 커피라도 잔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 내 삶도 선택에 따라 다양한 향기를 품게 되겠지. 다양한 커피잔을 늘어놓고 '오늘은 어떤 잔을 선택할까' 고민하는 일이 사뭇 즐겁게 느껴졌다. 내일은 어떤 일상을 만나게 될까 슬그머니 기대를 해본다. 어쩌면 내일은 새로운 변주곡을 듣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