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언니 집에서 놀고 있는데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ㅇㅇ야!ㅇㅇ야!"
문을 열고 나가니 H였다.
"왜?"
"우리 집에 가서 피.. 피아노.. 아 피아노 있다고 했지? 우리 집 가서 노.. 놀래?"
"아니! 금이언니랑 놀 거야"
"나도 같이 노.. 놀아도 돼?"
"언니야! H도 같이 놀아도 돼?"
"그래! 들어와"
언니네 집에서 인형놀이 했다가 푸른 하늘도 하고 딱지놀이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지루할 틈 없이 놀고 있는데 밖에서 쾅쾅쾅쾅 시끄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금이언니가 문을 여니 H 엄마가 다짜고짜 신발을 신은 채 집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H! 여깄었어? 엄마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너희, H 꼬드겨서 집에 데리고 와서 이렇게 늦게까지 놀면 어떡해? 어른 허락도 안 받고? 너희 부모님 장애인이라고 들었는데 애들 관리가 제대로 되겠어? 우리 애랑 안 놀았으면 좋겠네!"
금이 언니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H가 같이 놀자고 집 앞에서 저희 불러서 들어오라고 한 거예요"
"그럴 리가! 우리 애는 수준 떨어지게 집 앞에서 막 부르고 안 그래!"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줌마! H가 놀자고 했다고요. 아줌마는 왜 수준 떨어지게 남의 집에 신발 신고 함부로 들어와요?"
"어머! 어른한테 예의 없게! 가정교육을 그렇게 받았니?"
"아줌마! 예의는 아줌마가 젤 없어요! 저희는 가정교육 잘 받았고요. 아줌마가 가정교육 젤 못하고 있으니까 제발 가세요!"
"어머 어머! 쪼그만 게 어른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금이언니한테 사과하세요!"
"사과? 너 진짜 돼 발아 져서.."
찰싹! 아줌마가 화가 나서 내 뺨을 때리려고 하는 순간 얼른 손을 잡았다.
"지금 저 때리려고 한 거예요?"
"엄마 엄마 그.. 그만해요. 제가 오.. 온 거예요. 제발 가.. 가요! 미안해~~ 언니 미.. 미안!"
H가 흥분한 엄마를 데리고 나가자 나는 문을 얼른 닫고 잠가버렸다.
밖에서 아줌마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싸가지 없는 계집애가! 당장 문 열지 못해?"
한참을 분에 겨워 씩씩되더니 H가 울면서 한참을 말리자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언니야! 저 아줌마 이상해! 저 아줌마 또 찾아오면 어떡하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말하자 금이언니가 말했다.
"저런 사람들 많아! 우리 가족이 길을 나서면 시선이 우리를 쫓아와. 그래서 언니랑 나는 엄마와 아빠를 가운데에 두고 쉴 새 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면 목적지에 금세 도착해"
아! 언니네가 처음 이사 왔을 때가 떠올랐다.
나 또한 언니의 부모님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았었다. 데레사 씨가 들어가서 숙제하라고 나를 집으로 들여보내기 전까지..
그때 생각이 떠올라 언니에게 미안해져서 눈물이 났다.
"미안해 언니. 내가 괜히 H랑 같이 놀자고 해서"
"네가 왜 미안해? 괜찮으니까 그만 울어."
속상한 사람은 언니일 텐데 언니는 엉엉 우는 나를 담담하게 달랬다.
집에 갔더니 데레사 씨가 불렀다.
"목욕탕집 2층 아줌마랑 싸웠다며?"
이 놈의 동네는 소문도 빠르다.
"그 아줌마가 H가 우리랑 놀고 싶어서 온 건데 금이 언니 엄마 아빠가 장애인이라고 무시하고, 자기 딸이랑 놀지 말라잖아!"
"그렇다고 어른한테 바락바락 대들면 되냐?"
"아줌마가 나 때리려고 했어! 근데 어떻게 가만있어?"
"에휴~ 그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다음부터는 대들지 말고 바로 엄마 불러"
"알겠어~"
삐쭉빼쭉되며 대답하니
"맨날 알겠어! 알겠다! 이렇게 대답하지? 네~ 하라고"
"네!"
"아마 아이가 안 보여서 온 동네 찾아다니는데 못 찾아서 마음이 불안했던 모양이야. 사람마음이 불안해지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엉뚱한 곳에 퍼붓기 마련이야."
데레사 씨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화난 고양이가 문안으로 들어와 털을 곤두세우며 발톱을 끄집어내 마구 할퀴다 문밖으로 끌려가서도 문을 손톱으로 긁어내던 모양새가 떠오를 뿐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역시나 금이언니집에서 내 집인 양 함께 놀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났다.
"금이 있니?"
H 엄마였다.
"언니 언니, 미친 아줌마야. 문 열어주지 마"
"잠깐만 문 열어줄래? 문 앞에서 잠깐만 얘기할 거야"
금이언니는 내가 말리는데도 살짝 문을 열었다.
"아줌마, 왜 또 왔어요? 우리 H랑 안 노는데~ "
내가 뒤에서 외쳤다.
"휴.. 너는 또 와있니? 사과하러 온 거야. 금이야. 아줌마가 저번에 미안했어."
"네? 아.. 네"
"내가 흥분해서 말한 거 정말 미안해. 근데 너, 너도 나한테 사과해."
아줌마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요? 제가 사과를 해야 돼요? 근데 아줌마가 저 때리려고 하셨잖아요! 저 원래 엄청 예의 있는 어린이예요. 아줌마도 사과하세요"
"하.. 그래.. 때린 거 미안해. 됐지? 너도 어른한테 함부로 말한 건 맞잖니?"
"네~~ 죄송해요. 말대답 많이 해서"
어색한 사과를 주고받고 아줌마는 어색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우리의 데레사 씨가 목욕탕 2층 집을 찾아가서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상대로 못할 말하고 뭐 하는 행동이냐며 혼줄을 낸 것이다.
어른이 아이와 상대로 흥분하고 막말하며 싸우는 모습에서 어린아이 보다 더 어린 어른이를 보았다.
시간이 흐른다고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 사건은 어떻게든 지나갔지만 은이, 금이언니는 평생을 겪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은이언니와 금이언니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이언니와 금이언니는 자라면서 커진 몸과 마음으로 부모님을 향해 사랑의 보호막을 쳤다. 부모님에게 가장 좋은 유전자만을 선물 받아 그들에게 손이 되어주고 목소리가 되어주었다.
금이언니는 말했다.
"어렸을 때 나는 엄마, 아빠가 다른 아이들의 엄마 아빠와 달라서 처음에는 좀 부끄러웠어. 그래서 짜증을 내고 엄마 아빠한테 왜 평범하지 않냐고 소리 지른 적이 있어. 그랬더니 엄마가 수어로 미안하다고 나에게 사과를 하는 거야. 엄마의 잘못이 아닌데.. 자신들의 좋은 유전자를 골라서 나에게 주셔서 엄마아빠에게 사실은 너무 고마워. 엄마 아빠처럼 나도 아팠으면 어떡했을까 생각했을 때 사실 두려웠거든.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나쁜 아이 같아서 한동안 엄마아빠 눈을 피한 적도 있어.
이제 나는 엄마 아빠가 조금 다르다고 해서 부끄럽지 않아. 우리 부모님은 너무나 훌륭한 사람이거든. 바르고 강하고 다정해."
사람들은 자신들과 조금 다르다 싶으면 이상한 시선을 보낸다. 은이 금이 자매는 흔들릴 수 있는 10대의 나이에도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신들을 건강하게 낳아주신 것에 감사할 줄 알았다.
아이를 외롭게 만들고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몰라 아이를 상대로 나쁜 말을 하는 한 어른의 모습과 얼마나 비교가 되는지.. H는 엄마가 부끄럽고 밉지 않았을까?
학교 운동회날 H 엄마는 마치 방송국 카메라맨인 양 쉴 새 없이 H를 비디오카메라로 담았다.
집에 돌아와 데레사 씨에게 비디오카메라를 사자고 졸랐더니 데레사 씨가 말했다.
"영상 찍느라고 자기 딸이 뛰는 모습은 하나도 못 보던데 뭐! 영상으로 찍고 나중에 많이 볼 거 같아? 안 봐~~ 그딴 거 하나도 필요 없다. 너희 모습 엄마 머리에 다 찍혀있어. 영상으로 보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언제든지 중개해 줄 수 있으니까 언제든 얘기해"
하며 손사래를 쳤다. H를 향한 H엄마의 사랑은 본인 만족의 사랑 같았다.
H는 처음에 잘 몰랐는데 몇 번 만나 함께 놀아보니 말을 더듬거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말을 더듬을 때마다 오른발에 줄을 묶여 인형사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발이 들렸다.
H엄마는 좋다는 병원에 H를 데리고 다니며 언어와 틱을 치료받았다. 내가 봤을 때는 H가 아니라 H엄마가 치료를 받아야 H의 틱이 고쳐질 것 같았다.
H엄마만 빼고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H엄마는 자신을 치료하여 고치는 대신에 계속해서 H를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려고 노력했다.
H는 말을 점점 더 더듬었고 옆에 친구도 없었다. H의 엄마는 쓸데없이 친구들이랑 몰려다니지 말고 그 시간에 공부하는 게 H를 위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빨간 대문의 주택에 단칸방 가족을 보면서 알게 된 것은 '가난은 대물림되는 거구나'였다. 그들은 가난을 물려받지 않기 위해 죽을 만큼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금이언니 가족은 사랑의 대물림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들은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무기로 가진다.
사랑으로 자란 아이는 사랑할 줄 안다.
가난이 있더라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힘겨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유산인 것이다.
엄마 아빠가 되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아이에게 줄 선물을 준비해야 하므로..
실제로 웬만한 사랑의 양으로는 아이들을 흠뻑 젖게 할 수 없으므로..
끊임없이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먹이를 가져올 엄마새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아이들은 부모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래서 부모는 작정을 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끊임없이 사랑의 물을 줄 수밖에 없다.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늘 반성하는 이유도 그래서이다.
금이 은이 언니 이야기를 하다 보니 H의 안부가 걱정이 된다.
H의 발에 묶여있던 인형사의 줄은 사라졌을까?
H의 말은 자유를 얻고 편안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