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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칸방으로 사랑의 도피

by 고요한동산

쫓기는 꿈을 꿀 때가 있다. 군인들이 나를 끝도 없이 잡으로 오는 것이다. 그러면 빨간 대문 안 내 방으로 숨어 미닫이 문을 닫고 문걸이를 걸어 잠그고 숨을 죽이고 숨는다. 튼튼하지 않은 미닫이 문은 가운데를 잠그어도 끝쪽이 잠겨있지 않아 열리고야 만다. 그 순간에 끔찍한 공포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빨간 대문 안에는 미닫이 문을 가진 똑같은 단칸방이 너무 많았다. 계속 반복되는 패턴의 공포를 알 것이다. 미닫이 문 공포증이라고 해두겠다.


이러한 패턴의 칙칙한 단칸방들의 나열 가운데 상큼하고 풋풋하며 달콤한 20대 한쌍의 남녀가 이사를 왔다.

회색빛의 단칸방들 가운데 핑크빛의 방 하나는 꼬맹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언니와 나는 젊은 부부의 방이 궁금해 미닫이 문을 똑똑 두드려보았다.

그러면 스르륵 문을 열어 “안녕”하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손을 흔들며 발그스레한 미소를 짓던 언니는 공주님 같았다. 왠지 달콤한 향기도 나는 것만 같았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던 러블리한 침대에 티테이블을 보고 우리는 깜짝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입을 쩍 벌리고 말했다.

"와~~ 너무 예뻐요"

"끝내준다"

우리 반응이 재미있는지 상큼하고 풋풋하며 달콤한 커플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배를 잡고 웃어댔다.

눈 위에 사랑의 막이 씌어있는 사랑에 빠진 이들은 서로를 사랑의 렌즈로 바라보니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한 모양이었다.


빨간 대문의 단칸방이 저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우리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연탄보일러 따끈따끈한 방에 촌스러운 꽃무늬 이불을 깔고 방 끝에서 저 끝으로 굴러다니면서 자던 우리에게 각 잡힌 침대에 레이스 파스텔 이불이라니.. 너무 낭만적이 이었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남녀의 사랑의 불을 지켜주기에 단칸방은 심각하게 개방적이었다. 미닫이 문이 이중이어도 사랑의 도피의 장소로 빨간 대문의 단칸방은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사랑을 나누다가 당장이라도 누가 벌컥 문을 열것만 같은 불안한 공간에서 신혼을 즐길 수 있었을까?

사랑은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작동되니 문제없었을까?


평상에 앉아 동네 이야기를 나누는 아줌마들의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단발머리 S컬을 하고 매니큐어를 예쁘게 칠한 예쁜 언니는 부잣집 딸이고 가난한 별 볼 일 없는 남자랑 눈이 맞아 집을 나와 단칸방에서 산다'는 것이었다.


철부지 공주님은 사랑을 위해 집을 나왔지만 연탄을 갈아본 적이 없었다. 연탄집게를 연탄에 끼워 들어 올리고 돌아서면서 연탄을 놓치기 일쑤고 제때 연탄을 갈지 않아 항상 불을 꺼뜨렸다.

"아줌마! 연탄 꺼졌어요."

추운 겨울 얇은 예쁜 원피스를 입고 우리 집으로 와 데레사 씨를 부르며 동동 거리면 데레사 씨는 우리 집 활활 타오르는 연탄을 하나 집어가 넣어주고 새 연탄을 위에 올려주었다.

"꺼지기 전에 갈아야지~"

"오빠가 일하러 가서 언제 갈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수시로 연탄 잘 있나 확인해 봐"

하며 데레사 씨가 연탄을 갈고 연탄집게를 돌려주었다. 그녀가 연탄 가는 걸 성공했었나 기억에 나지 않는다.


가장 미스터리했던 것은 빨간 대문의 공주님이 화장실에 가는 걸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급한 모습을 하고 어디론가 뛰어가는 걸 여러 번 봤는데 그녀는 어디를 그리 급히 간 걸까?

빨간 대문의 주택 안에는 공용욕실이 있었는데 공주님은 공용욕실을 사용하지 않고 매일 아침 작은 바구니에 샴푸와 린스를 담고 목욕탕으로 씻으러 갔다.

목욕탕을 매일 가서 저리도 뽀얗고 예쁜가 보다 하고 우리는 생각했다.


동네 꼬마들은 단칸방의 공주님 방이 보고 싶어 근처를 자주 어슬렁거렸다.

공주님의 단칸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동화 속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끝도 없이 차가운 현실 한가운데 얇은 벽으로 둘러싸인 단칸방 하나에 거처를 잡고 젊은 남녀는 작은 꿈의 성을 짓고 공주와 왕자가 되었다.


"언니네 집안에서 잘생긴 오빠를 허락하면 여기에서 나가 더 좋은 집으로 가게 되는 걸까?"

"언니네 집에서 언니 잡으러 오면 어떡해?"

"그럼 대문을 잠그고 못 들어오게 우리가 막자!"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얘기를 철썩 믿고 우리는 재잘 됐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풋풋하고 상큼하며 달콤한 한 쌍의 남녀가 살던 러블리한 침대와 티테이블이 있던 꿈의 성은 사라지고 회색빛의 칙칙한 다른 방과 다르지 않은 단칸방으로 변해있었다.

그들이 이사 온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언니네 집안에서 그들의 사랑을 허락했을까?

아니면 여기에 있는 걸 들켜서 언니네 집에서 언니를 끌고 갔을까?

혹 돈을 모아 좀 더 좋은 곳에 다른 꿈의 성을 지었을까?


우리에게 달콤한 드라마 같은 사랑의 단칸방을 마법처럼 보여주고 뿅 하고 사라져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언니가 보여주었던 환상의 방 때문에 우리는 침대가 갖고 싶었다. 데레사 씨를 조르고 졸라서 백화점에 가서 침대를 샀다.

언니가 용돈을 한 푼 두 푼 모아놓은 통장을 열어 몇십만을 내놓았다. 나는.. 통장을 열어보니 이만 원 정도 있었나? 돈 모으는 데는 어렸을 때부터 젬병이었다. 용돈 받으면 먹고 싶은 과자 사 먹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느라 모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쓸데없이 용돈을 탕진하는 동안 언니는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목돈을 만들었다.


첫 번째 통장을 내놓은 것은 침대를 샀을 때이고 두 번째 통장을 연 것은 막내가 게임을 하고 싶어 동네 친구집에 매일같이 놀러 갔다가 그 집 선인장에 넘어져서 엉덩이에 가시를 잔뜩 박아 온날이었다.

"으아 이게 뭐야. 막내 불쌍해. 엄마 나 통장에 돈 있으니까 막내 게임기 사줘"

그래서 우리 집에는 게임기가 생겼다.

그럼 나도 돈을 보태겠다며 통장을 내놓았지만 역시나 나는 몇만 원 없었다.

그러고 나서도 잊을 만하면 모아놓은 통장을 큰일이 생길 때마다 열어주곤 했다.

평상시에 100원 200원 아까워서 못쓰고 짠순이처럼 살다가 알뜰살뜰 모아서 결국은 가족을 위해 목돈을 내놓은 사람이 언니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것처럼 꽁꽁 자기 걸 챙기면서 결국은 가족을 위해 쓰고 마는 것이다. 씀씀이 좋게 마음 넓게 이야기하는 나는 정작 가족을 위해 통장을 연 적이 없다. 결국 이기적으로 살아온 것은 나였다.


다시 사랑의 단칸방으로 돌아오면 어찌 되었건 그들이 잠깐 동안 머물러 주어서 침대가 생겼다는 것이다.

공주님과 왕자님이 머물다간 동화 속 단칸방과 뒤쪽 단칸방을 터서 언니와 내 방이 만들어졌다. 침대하나, 책상 하나, 책장하나 각 잡힌 나만의 방은 꿈만 같았다.

다만 겨울이 되면 겨울왕국의 얼음궁전도 아닌데 얼음집처럼 추워서 잘 수 없다는 맹점이 있었지만 그것만 빼면 완벽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사건이 뉴스에 나오기 시작할 때였다. 아이들끼리 자는 방에는 연탄을 떼지 않고 난로를 켜고 지냈다. 점점 연탄보일러에서 기름보일러로 바뀔 때였다. 연탄이 천장까지 쌓여있는 창고에서 연탄을 하나씩 가져다가 연탄을 갈고는 했었는데 연탄 수가 줄어들 때쯤에 연탄가게 아저씨가 트럭으로 연탄을 싣고 와 우리 모두 나가 함께 연탄을 창고로 옮겨놓곤 했다. 손에 얼굴에 새까 많게 묻은 모습을 보고 서로 웃음보가 터지곤 했다.


빨간 대문의 단칸방에 머물던 손님들이 모두 나가고 리모델링을 한 후 우리 집에 사는 사람이 봉칠이네 밖에 없을 때도 우리 집은 연탄을 들여놓았다.

비가 새는 창고에서 눅눅해지는 연탄과 아궁이가 자꾸 막혀 고장 나는 연탄보일러를 몇 차례나 고친 후에 기름보일러가 들어왔다. 이제 모든 집이 가스보일러인 현재도 빨간 대문의 집은 비싼 기름보일러로 올 겨울을 난다.


공주와 왕자가 머물다간 꿈의 단칸방은 막상 들어가 보니 환상일 뿐인 차디찬 얼음골이었다. 환상을 거두어 내면 생각과는 다른 장면이 펼쳐지는 경험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하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의 꿈의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차가운 현실에서도 따뜻한 동화 속에 있다는 착각을 하며 행복해질 수 있으므로.


우리 집 첫째는 산타할아버지를 믿고 싶어 한다. 믿지 않지만 믿는다.

그래야 산타할아버지의 마법과 같은 선물을 받을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는 정말로 신이 존재하기 때문일까?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존재함으로 내가 더 바를 수 있고 행복하다면 그렇다고 믿는 것이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들으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품는 환상과 신은 내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우주가 하나의 압축된 점에서 시작되었다면 내 마음속 하나의 점이 어떠한 파동으로 새롭고 광활한 우주를 펼쳐낼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사랑으로 허름한 단칸방을 사랑의 도피처로 삼고 그들이 짧은 시간 행복했다면 그들의 삶은 함께 할 것이고 그 시간이 괴로웠다면 그들은 각자의 길로 갔을 것이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결정하는 힘은 아주 사소하면서 작은 것에서 나온다.

운이 좋아 사소한 것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큼하고 풋풋하며 달콤한 커플의 짧은 사랑의 도피는 우리에게 침대라는 선물을 하사했다. 그리고 설렘 가득한 풋사랑의 환상도 덤으로 받았고 말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그들이 빨간 대문 안 단칸방에 살다 가주어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왕자님!


과거를 돌이켜보면 자그마한 기억이라도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하는 작은 행동과 말이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탄소가 사라지지 않고 변화하며 세상에 어느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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