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언니 옆 방에 은이, 금이 자매가 이사를 오고 경이언니는 은이언니와 단짝이 되었다. 조용히 미소만 짓던 그녀가 동갑내기 친구와 재잘재잘되며 푸핫 하며 웃음보가 터지는 그 모습이 좋았다. 친구가 전부인 시기에 좋은 단짝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것만큼 힘이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나는 부지런히 금이언니를 쫓아다녔다. 아마도 참 귀찮은 동생이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들은 동네를 휘저으며 담을 넘고 외부계단이 있는 남의 집 2층 계단을 뛰어내리며 활기차게 부지런히 놀았다.
나는 또래보다 머리하나 이상 작았고 말라깽이 었다.
둘이서 놀고 있는데 깡마른 아이가 지나가는 걸 보고 "쟤봐! 다리가 나뭇가지처럼 앙상해" 했더니 금이언니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그래."
나뭇가지처럼 말랐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그 말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내가 바라보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는 너무나 달랐다.
우리는 국민학교로 입학해 초등학교로 졸업했다. 1학년 때 일주일은 오전반, 일주일은 오후반으로 나뉘어서 학교를 갈 만큼 아이들이 많았다. 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위기의 나라가 된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이었다. 당번은 등교해 초록색 통에 담긴 수십 개의 우유를 가지고 왔고 겨울이 되면 난로에 넣을 나무를 배급받아왔다. 나무를 떼는 난로라니.. 우리나라가 급속도록 발전하긴 했나 보다.
80년대 국민학교는 활기찼다. 핸드폰도 없었고 TV 채널도 공영방송 밖에 없었던 때여서 리코더 배워 집에서 줄기차게 불고 동요를 배워 목소리 높여 부르고 줄넘기 배우면 집에 와서 열심히 연습했다. 기악부, 합창부, 미술부, 체육부, 과학부, 방송부 가운데 특별활동 하나를 선택해서 들었고 어느 부를 들을까 상당히 진지하게 고민했다.
“우리 작은북으로 오디션 볼래?”
기악부에서 멜로디언을 불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금이 언니가 말했다.
“작은북 좋아”
작은북을 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상상 속에서 북 치는 소녀의 모습은 너무 멋지고 찬란했다.
북 치는 소녀가 되고 싶었다.
금이언니와 함께 드럼채를 구입해 오디션에 필요한 리듬을 연습했다. 드럼채를 한 몸처럼 들고 다녔다. 국민학교 넓은 운동장을 넘어 오른쪽 끝 귀퉁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에 온몸을 맡기며 흩날리는 버드나무의 긴 초록색 실타래 안으로 들어가 우리는 연습을 했다. 벤치를 작은북 마냥 두드리고, 쪼그려 앉아 화단 경계석을 두드렸다. 버드나무가 우리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내가 치는 리듬이 제법 맘에 들었다.
기악부 오디션을 보는 날이었다. 오디션을 보기 전에 기악부 선생님이 같은 학년 친구 한 명과 나를 같이 불렀다.
"작은북을 치려면 작은 북이 흘러내리지 않을 만큼 커야 해."
"할 수 있어요." 그 친구는 말했다.
선생님은 그 친구의 허리에 작은북을 매어주었다
"자 허리에 한번 매어 봐. 봐봐 흘러내리지? 작은북 치려면 좀 더 커야 해."
"저도 작은북 허리에 매 보면 안돼요?"
용기 내어 말했다.
"둘 사이즈가 비슷한데 뭘 매봐? 똑같지"
건성으로 나에게 답하고 나서 옆에 있던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00야. 너는 뭐든지 잘하니까 잘 할거 알아. 내년에 도전해 봐."
"네"
옆에서 작은 북한번 만져보지 못한 채 북 치는 소녀의 꿈은 사라졌다.
작은북을 못 들 것 같아서 오디션을 볼 수가 없다니 납득할 수 없는 형태로 첫 실패를 맞았다. 작은북을 못 쳐서 속상한 건지 선생님의 말투와 시선 때문에 속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지독히도 건망증이 심해서 앞에 했던 행동을 되풀이해서 잊어버린 단서를 찾곤 하는데 어릴 때 기억은 왜 이리도 선명한 걸까.
기악부 선생님의 시선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존재감 없이 서 있던 나와 선생님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던 사랑받는 아이!
모두에게 사랑받을 조건을 갖춘 그 아이는 나에게도 역시 친절했다. 그 아이를 미워하려야 할 수 없는 완벽한 아이였다. 선생님은 완벽한 소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작은북을 허리에 매어주며 친절히 말했지. 그리고 나를 흘끗 보고 “너도 마찬가지고”라고 얼버무렸지.
‘저 잘 칠 수 있어요. 연습 많이 했어요. 작은북 꽉 매고 할 수 있어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약했던 나는 말없이 끄덕일 뿐이었다.
선생님은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어린 나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야 말았다. 하나는 작은북을 내 허리에는 매주지 않았고 나의 리듬을 들어봐 주지 않은 것이고 두 번째는 둘이 있었음에도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완벽한 소녀에게 딸린 부록처럼 대했다는 것이다.
어릴 때의 경험은 밑바닥에 무섭도록 쌓여 중요한 순간에 결정권을 가진다. 시도해 보지 않은 실패는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해봐야 안될 거야’라고 뇌에게 속삭인다. 있음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를 향하지 않았던 시선은 타인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마다 거대한 막을 생성해 방어벽을 치게 한다.
가치 없는 존재로 점찍고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은 무섭도록 마음을 공허하게 만든다.
북 치는 작은 소녀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다.
금이언니는 작은북 오디션에 붙었다. 북 치는 소녀는 바로 금이언니였다. 언니가 치는 북소리는 힘 있고 듣기에 좋았다. 작은 아이는 작은북의 군단을 흘끗흘끗 바라보며 수많은 멜로디언 군단사이에서 멜로디언을 열심히 불었다. 미약할지라도 멜로디언의 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며..
드럼채를 아무도 보지 못하게 가방에 넣어가 푸르게 살랑거리며 춤을 추는 버드나무를 가두어 둔 경계석을 홀로 두드리며 버드나무의 자유의 리듬을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