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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pr 26. 2018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화려한 파리에 가려진 아버지의 희생

파리의 화려함. 그리고 그 이면의 허영과 우울. 이것은 소설 <고리오 영감>에 드러난 모순이다.


법학을 공부하는 라스티냐크라는 한 젊은이는 사교계에 입성하여 성공하겠다는 일념하에 홀로 파리로 온다.


보케 부인이 이끌어가는 하숙집에 들어간 라스티냐크는 같은 층에 살고 있는 고리오 영감과 가까워 진다. 왕년에 잘나갔던 제면업소의 사장이었던 영감은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단칸방에서 하숙하는 신세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부인을 잃은 이 사업가는 사랑하는 두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 옛날 화려했던 사업장과 집, 온갖 돈이 될만한 것들을 팔아 딸들을 치장하는데 다 써버린 늙은 노인.


그러나 이제 무일푼이 되어버린 고리오 영감에게 돌아온 것은 딸들의 무시와 멸시, 그리고 가난 뿐이다. 딸들은 아버지의 희생으로 좋은 가문에 시집을 갔지만,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바람에 불행한 삶을 산다. 걸핏하면 아버지를 들들 볶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낼 생각 뿐인 딸들은 이제 파리의 허영이 낳은 괴물에 불과하다.


그런 괴물이 되기 위해 파리로 온 라스티냐크는 밤마다 돈이 될만한 것을 찾아 헤매는 고리오 영감에게 측은함을 느끼고, 자신이 정말 그들과 같은 괴물이 되고자 하는 것인지 갈등한다.


고리오 영감은 건강이 안좋아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딸들을 위해 희생하려하지만 딸들은 아버지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이 한 푼이라도 더 갖겠다고 서로 헐뜯고 싸운다. 사랑하는 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도 행복하기만 했던 영감은 이 둘의 싸움으로 깊이 상심한다. 그리고 병세가 깊어져 결국 죽고 만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장에 온 사람은 라스티냐크 뿐. 딸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결국 그 일방적인 사랑을 인정받지 못한 가엾은 노인, 고리오.


라스티냐크는 분노한다. 그리고 파리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허영에 도전장을 내민다.


자, 이제 파리와 나와의 싸움이다!


라스티냐크의 야망은 개츠비의 초록 불빛이자 찰스 스트릭랜드가 동경했던 달빛과도 같다. 이르고자 하는 이상, 그러나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마치 고리오 영감의 두 딸들이 사교계에서 유명해지기 위해 아버지를 희생시킨 것 처럼, 라스티냐크는 파리의 온갖 허영을 이기고 사교계에 입성하기 위해 양심과 타협한다.


고리오 영감의 희생적인 삶을 보면 우리네 어버이의 그것과 참 닮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상위에 위치하고 있다는 자아 실현의 욕구. 그러나 이 자아 실현의 욕구까지 꺾어 가면서 타인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부모라는 존재다.


그것이 아무리 물질과 쾌락에 매몰되어 있더라도, 아무리 비양심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자식이 원하는 것은 모두 다 이루어 주고 싶은 마음. 그것은 희생이다.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갈 지라도 부모의 내리사랑은 일단은 숭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그 모순된 숭고함은 자식에게 해로 다가온다. 고리오 영감의 희생을 먹고 자란 두 딸은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지만 비인간적이며 비윤리적인 괴물들이다. 결국 고리오의 희생은 괴물을 낳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잘못됐음을 알면서도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자처하는 라스티냐크.


괴물을 키우고, 스스로 괴물이 되려하고, 자신들이 괴물인지도 모르는 채 파리라는 도시에 엉켜 사는 존재들. 이들은 사실 인간의 단면이다.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허영과 욕심이 우리 역시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 괴물들은 서울, 런던, 베를린 등 도처에 퍼져있다. 그리고 우리를 남들과 비교하고 서로를 헐뜯고 만족할 줄 모르는 불행한 존재로 만든다.


생각해 보자. 지금 당신을 괴물로 만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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