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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Mar 19. 2019

오노레 드 발자크, 미지의 걸작

화가 프렌호퍼, 그림에 생명을 부여하다

미지의 걸작, 훑어 보기


길고 어려운 서술에 섣불리 지치거나 포기해선 안된다. 루벤스니 앙리 4세니 하는 부차적인 인물을 거론하는 것은 화가 포르뷔스의 유명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 잊어버려도 좋으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젊은 화가 푸생이 당대 유명화가인 포르뷔스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프렌호퍼라는 노화가까지 한 자리에서 만난다는 서사다. 이 노화가는 마뷔스의 유일한 제자로 그림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입체감의 기법을 전수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의 기술을 너무 절대적으로 믿고있는 탓일까. 프렌호퍼는 포르뷔스가 그린 성녀의 그림에서 생명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며 맹비난하면서, 오히려 신출내기 화가 푸생의 데생을 큰 돈을 주고 사들인다.


그리고 자신이 가르침을 줄 기회를 달라고 제안하며, 발작적이고도 광기어린 동작과 함께 화려한 색을 입힌 붓터치로 죽어있는 그림에 생명력을 더한다.


이 셋은 프렌호퍼의 저택으로 자리를 옮겨 미술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그는 단지 해부학적으로 신체를 묘사하고 명암을 넣는 것 이외에 존재의 정신과 영혼을 포착하여 그림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포르뷔스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미지의 걸작에 대해 언급하며, 비밀에 싸인 프렌호퍼의 아틀리에에 대한 호기심을 내비추지만, 프렌호퍼는 아직 완전무결한 여자를 만나보지 못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그림이 아직 미완성의 상태로 남아있다고 딱잘라 말한다.


한편, 지금껏 자신의 능력을 의심해왔던 신인화가 푸생은 두 대가들을 만나고 온 뒤 비로소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마음속에 야망을 품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애인인 질레트를 프렌호퍼의 모델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녹색광선 출판사
미지의 걸작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인가


그림의 완성도 보다는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의 수준 측면에서 미지의 걸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프렌호퍼가 그린 그림은 범인의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해 미지의 공간에 남은 걸작. 안타깝게도 대중은 새로운 것보다는 이미 검증받은 것에 더 익숙하다.


만약 질레트가 그 그림의 아름다움을 인정했다면 한낱 애송이일 뿐인 푸생의 팔레트 속 '추억'으로 남는것 보다는 명작 안의 '뮤즈'로 남았다는 영광이 더 먼저였을 터.


그러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지 낯선이 앞에서 옷을 벗었다는 수치만이 남은 것이다. 게다가 푸생은 자신은 안중에도 없고 단지 대가의 그림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그 상황이 얼마나 경멸스러웠을까.


<미지의 걸작>에서는 한 개인의 순수한 열망뿐만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비추어지는지에 대해 조명한다.


개인적으로는 한 사람이 열심히 이루어 온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비웃음을 사고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가슴아팠다. 나 역시 아무런 보상없이 2년 가까이 공들여 온 것이 있어서인지 프렌호퍼의 절망감이 마치 나의 일처럼 다가왔다.


프렌호퍼가 그만의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십년간 작업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단지 확신만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니다. 자신의 목표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긴장했다. 매일 밤 고뇌했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확신없이 지속해 온 식어버린 열정을 들켜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때로는 이미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것들이 내 마음을 짓누르고 무겁게 한다. 그래도 어떡하나. 멈출 수 없는 것을.

이미 절반은 와버린 길을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프렌호퍼도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을테고 하루는 확신으로, 또 다른 하루는 의심으로 보내며 정신적으로 많이 약해져있었을 것이다. 나처럼.


프렌호퍼의 꿈과 끝,
추상미술의 시작이 되다

신생화가 푸생과 당대의 화가 포르뷔스.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역사를 썼던 프렌호퍼.

미술사의 현재와 미래로부터 부정당한 과거의 죽음을 지켜보며, 무엇이 걸작이고 무엇이 졸작인지 평가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나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는 신념의 불완전성을 다른 사람이 눈치 챈다면 얼마나 수치스럽고 가슴이 아플까. 그래도 옳다고 꾸역꾸역 덧칠해 빈틈을 가려본다한들, 남들의 눈에는 아무리 작은 흠일지라도 크레바스처럼 깊고 크게 보이는 법이다.


그의 희생으로 현대의 추상미술이 시작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무의미하고 무모한 도전은 아니였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프렌호퍼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이 책을 덮을 때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슬펐다.


단지 내가 좋아서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뭔가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남들에게는 그저 가십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의 성과에 만족감을 가졌던 찰스 스트릭랜드가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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