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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ug 12. 2019

김승옥, 무진기행

인간 윤희중의 ‘무책임한 역사’, 그 앞에 놓인 운명과 선택에 대하여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과는 거리가 먼,
자아를 상실하는 곳, ‘무진’

<무진기행>은 제약회사에 다니는 30대 남성, 윤희중의 이야기다. 곧 있을 전무로의 승진을 앞두고, 마음을 가다듬을 겸, 고향 ‘무진’에 들러, 자기혐오에 찌들었던 옛 시절을 회상한다.


희중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을 때, 은신처처럼 ‘무진’을 이용했다. 6.25 때 동급생들이 모두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때도, 무진의 골방에 틀어박혀 시절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렸고, 연인과 헤어졌을 때도, 폐병으로 몸이 아팠을 때도 무진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탄탄대로를 앞두고 도피가 아니라, 요양차 무진을 방문한 것이다.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여, 능력 있는 장인어른 덕에 30대 초반에 제약회사의 전무가 되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희중. 그를 두고, ‘무진’은 이미 온갖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금의환향은 아니었다. 희중은 무진을 떠올릴 때마다 왠지 모를 자기혐오와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옆집 아무개의 전사 소식을 들을 때마다 당신 아들의 무사태평에 이상스레 기쁨을 느꼈던 어머니와는 반대로 희중은 전쟁에 나서려 했다. 그러나 뒤늦은 양심은 어머니의 만류로 불발되었다. 결국 그들이 닦아 놓은 평화의 다리를 건너, 어린 나이에 전무로 승진하게 된 희중은 모든 것들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렇다. 이번에도 희중은 자신의 어깨 위에 놓여진 부담감과 책임감으로부터 도망쳐 가방만 하나 들고 ‘안개’ 낀 무진으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엔 켕길 것이 없다는 점이다. 병역을 기피하지도, 실연을 당하지도, 몸이 아프지도 않은 채로 그저 더 큰 감투를 쓰게 되었다는 배부른 투정으로 무진을 찾았기 때문이다.


무진으로 향한 날, 희중은 역 근처에서 미친 여자를 하나 본다. 육체만 살아서, 죽은 정신은 원초적인 자극에만 반응하는 껍데기 같은 모습은 마치 희중이 영장을 피해 골방에 틀어박혔던 그때 그 시절의 자신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골방 속에서 희중은 자아를 잃고, 생존만을 얻었다. 정신은 죽었고 육체만 간신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숨기고 싶은 그때의 추억이 미친 여자의 모습에서 상기되는 순간, 희중은 부끄럽고 괴로워졌다. 햇빛과 시원한 바람과, 근해에서 풍겨져 나오는 소금기. 이 세 가지 조합으로 수면제를 만들겠다는 엉뚱한 상상. 무진에만 오면 희중은 자아를 상실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너무나 평온한 일상은 일탈에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희중은 부자 장인어른과 예쁜 아내를 서울에 두고, 무진으로 돌아와 일시적인(그리고 무책임한) 일탈을 꿈꾼다.


자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 반색하는 후배 ‘박’, 그리고 그가 짝사랑하는, 서울의 음대를 졸업하고 무진의 학교로 갓 부임한 음악 교사 ‘하인숙’, 또 자신의 모든 것을 부러워했던 친구 ‘조’. 이들은 소용돌이처럼 희중을 일탈로 끌어들인다.


 특히나 ‘인숙’은 희중이 마치 자신과 꼭 빼닮았다고 여기는 여럿 중 하나였다. 그녀는 성악 씩이나 전공했다면서 속물들 사이에 끼어서 아리아가 아닌 속된 가사의 유행가나 부르며, 눈요깃감이 되길 자처하거나, 서울로 가겠다는 일념 하에 유부남과 교합하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목표 지향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부자 과부를 낚아 승승장구하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이었을 터.


희중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내걸며 욕심 많은 아가씨를 희롱한다. 이미 버릴 수 없는 안정된 삶이 있는 자신에게, 출세하고 싶어 안달 난 시골 여교사가 눈에 찰리는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중은 잠시나마 인숙을 사랑했다. 마치 모든 책임으로부터 회피하여 골방에만 갇혀 있었던 예전의 ‘나’와 같은, 그 가난하고, 불안하고, 무진을 떠날 날만을 기다리는 어린 여자를 말이다.


무진에 온 첫날 보았던 ‘미친 여자’, 야욕에 눈이 먼 ‘인숙’ 외에도 그가 동질감을 느꼈던 여자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청산가리로 음독자살한 술집 작부였다.


무진의 ‘안개’는 한 번에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청산가리 같은 것이 아니라, 그럴듯한 조합으로 만들어낸 ‘수면제’에 가까웠다. 죽을 용기는 없고, 그저 자신의 불안과 우울에 심취해 곧이라도 죽을 것처럼 떠들썩한 연극으로 난리만 피우는, 아주 그럴듯한 자기 연민 증폭제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먹으면 시체가 되는 청산가리와는 달리, 결국은 깨어나 부끄러운 오욕의 역사를 뒤로하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삶을 살아가는 것. 수면제는 육체는 살아있지만 정신은 죽은 그때  골방 시절과도 같은 무책임한 눈속임일 뿐이었다.


희중은 자신처럼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죽음을 택한 술집 작부의 시체를 바라보며 분명 동경 같은 것을 느꼈다.


국가가 자신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군대를 가지 않았고, 용기가 없어 자살하지 못했고, 모든 것에 서투르고, 마음 붙이지 못하는 ‘자신’은 여전히 줏대 없는 쭉정이일 뿐이었다.


그리고 인숙과의 데이트를 앞두고, 새벽같이 날아온 아내로부터의 전보에 허둥지둥 서울로 올라갈 채비를 하며, 여느 때처럼 무책임하게 ‘인숙’에게 쓴 편지를 찢어버리고는 무진의 ‘안개’로부터 도망쳐 나온다.


<무진기행>의 ‘안개’와 <페터 카멘친트>의 ‘푄’,
운명과 선택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개’와 ‘푄’. 그들은 얼마나 다를까. 헤르만 헤세의 데뷔작인 <페터 카멘친트>에서 등장하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푄’은 산사면을 내려가며 비를 흩뿌리는 돌풍을 말한다. 지형적인 특성이 아주 강한 바람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높새바람이라고도 부른다.


이에 반해 ‘안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조건만 충족된다면, 우리 모두가 땅으로부터 살짝 뜬 구름을 볼 수 있고, 그 구름은 우리의 시야를 가려 버린다.


이 둘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진다. 안정된 삶 속에서 불쑥불쑥 떠오르는 일탈에의 욕구, 혹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회귀 본능.


윤희중은 ‘안개’로부터 도망쳤고, 페터 카멘친트는 ‘푄’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운명은 개인에게 선택의 시간을 준다. 떠나거나 돌아오거나, 그것은 운명과 같은 문제이지만, 선택은 개인이 하는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아이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앞다투어 군에 입대하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던 한국 전쟁의 시대. 윤희중은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골방 신세를 자처한다. 어머니를 위한 길이랍시고 제 목숨만 보전한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 친구와 헤어져 무진에 돌아왔다가도 과부와의 결혼을 위해 서울로 떠나고, 인숙을 뒤로하고 ‘전무’ 자리를 위하여 또다시 떠난다.


몇 대를 걸쳐 카멘친트가 의 본거지가 되어 버린 ‘푄’이 내려 부는 그 마을과는 다르게, 무진은 윤희중 ‘자신’ 마저 없는 황무지나 마찬가지다. 그저 책임을 버리고 싶고, 자신을 버리고 싶을 때 내려가 정신은 죽은 채 육신만 보전하는 껍데기 같은, 마치 실체 없는 안개 같은 그곳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아마도 필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희중이 선택해 온 오욕의 역사는 어쩌면 최적의 답안 지였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희중은 부와 명예를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운명이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책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페터 카멘친트는 카멘친트가를 떠나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났다가 아픈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고향으로 되돌아오고, 윤희중 역시 자신의 아내가 있고 장인이 기다리는 서울로 돌아가 ‘전무’로서의 책임을 지기 위해 무진을 떠났기 때문이다.


‘푄’과 ‘안개’는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종용하는 기폭제 같은 역할을 한다. ‘푄’은 페터를 끌어당기고, ‘안개’는 희중을 밀어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끌려갈지, 혹은 밀려날지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이라는 점이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심을 지키는 것은 역시나 ‘나’다. 그러나 그 중심을 찾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무수한 사건이 발생한다.


<무진기행>은 운명에 휘둘리면서도 선택적 책임으로 출세하게 된 기회주의자 윤희중의 삶을 그리고 있다. 반대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흩어 버리기 전까지는, 안개는 그 자리에 머물러 인간의 시야를 가린다. 그러나 아무리 농밀한 안개라도 운명의 소용돌이가 불기 시작하면 걷히고야 만다. 결국 시야가 깨끗해졌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는 개인의 선택과 우연한 기회에 따르는 것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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