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 둘. 에곤 쉴레(Egon Schiele)

스물 여덟에 별이 되다, 에곤 쉴레의 삶과 그림

by 고요
스물 여덟에 별이 되다, 에곤 쉴레의 삶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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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가, 에곤 쉴레
에곤 쉴레는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이다. 자화상, 왜곡된 몸체의 표현, 뛰어난 소묘력으로 유명하며 초기에는 빈 분리파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영향으로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하였으며, 점차 독자적인 표현주의 화풍을 구축하게 되었다.


15세 때,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하자, 외삼촌인 Leopold Czihaczec의 피후견인이 되어 보살핌을 받았으며, 일찍이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본 외삼촌 덕에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학교(Kunstgewerbeschule)에 입학하였다. 입학 후 1년 만에 빈 미술학교(Akademie der Bildenden Kunste)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보수적인 학풍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만다.


2. 구스타프 클림트와의 만남
학교를 그만 둔 에곤 쉴레는 클림트를 찾아가고, 클림트는 젊고 재능있는 화가에 관심을 갖고 멘토링을 해 준다. 그는 에곤 쉴레의 작품을 사기도 하고, 자신의 것과 교환하기도 하면서 제자를 넘어선 동등한 화가로서 인정을 해 준다. 또한 제체시온(Secession, 빈 분리파: 바그너의 영향으로 역사주의로부터 분리하려고 구스타프 클림트와 올브리히가 결성한 예술학파)과 연계된 비엔나공예공방(Wiener Werkstatte)에 그를 자신의 제자로 소개시켜 준다.


에곤 쉴레는 1908년, Klosterneuburg에서 첫 단독 전시회를 열었으며, 3학년 까지 학교를 마친 뒤, 몇몇 친구들과 함께 신예술가그룹(Neukunstgruppe)을 결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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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에곤 쉴레의 화풍
에곤 쉴레는 그로테스크하고 에로틱한 그림체로 유명하다. 포르노에 가까운 외설적인 성(性)과 죽음, 그리고 자화상에 집중하였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 대한 헌화로써 해바라기를 주제로 많은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구스타프 클림트에 영향을 받아 우아한 장식적 요소에 매력을 느꼈으며, 때문에 초기에는 그래픽적이고 드라마틱한 양식을 선보였다. 그러나 점점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켜나가 급진적 표현주의적 요소를 내포한 거칠고도 격렬한 감정 표출의 형태로써 윤곽선을 그려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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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에곤 쉴레에 대한 논란
에곤 쉴레는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Valerie(Wally)와 교제하며, 그녀를 대상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둘은 에곤 쉴레의 어머니가 태어난 고향으로 이사를 갔고, 미성년자를 모델으로 그림을 그리는 등 비이성적 행동으로 논란을 일으키며 마을에서 쫓겨난다. 그 후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후에도 미성년을 유혹했다는 혐의로 체포 당하게 되며, 그의 작업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여러 점의 외설적인 그림이 발견 되면서, 더욱 거센 비난을 받았다. 조사 후, 아동 성추행에 대한 혐의는 무죄로 인정 되었으나, 저속한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짧은 기간이지만 복역하게 된다.


출소 후, 사회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중산층 가정의 자녀인 Edith와 결혼을 결심하나, 그는 여전히 Wally와 헤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Wally는 그의 결혼 계획을 듣자 마자 그를 떠나 다시는 돌아 오지 않고, 그녀를 잃은 슬픔에 '죽음과 소녀(Death and the Maiden)'라는 작품을 그렸다. 1915년, 에곤 쉴레는 모두의 반대 속에서도 Edith와의 결혼을 강행하였으며, 그의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인 6월 17일 둘은 부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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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에곤 쉴레와 전쟁, 그리고 화가로서의 성공
결혼한 지 3일 후, 에곤 쉴레는 징병되어 세계1차대전에 참전하였으며, 그의 재능을 존경했던 군 간부 덕에 좋은 대우를 받았고, 전장에는 나서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대신 러시아 군인 포로들을 감독하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1917년, 에곤 쉴레는 빈으로 돌아와 예술가로서 작품에 몰두하여, 더욱 성숙해지고 풍요로워진 화풍으로 세간의 인정을 받게 된다. 또한 빈 분리파의 49회차 전시회에 초청을 받아 메인 홀에 그의 작품을 전시하게 되었다. 그 때, 최후의 만찬을 모티브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자신의 자화상을 대신 그려 넣은 전시회의 포스터를 그렸으며, 전시회는 큰 성공을 거두어 에곤 쉴레 또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같은 해, 드레스덴, 취리히, 프라하에서도 성공적인 전시회를 열었고, 신예술가그룹의 전시회도 병행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918년 발생한 스페인 독감으로 아내를 잃고, 에곤 쉴레 또한 3일 후 28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아내가 죽은 후에도, 아내의 모습을 스케치로 남겼으며, 이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 직접 번역한 자료입니다. 무단 사용 금지해요!

레퍼런스:
http://www.egon-schiele.net/biography.html
http://www.theartstory.org/artist-schiele-egon.htm
http://www.moma.org/collection/works/60325?locale=en
http://www.independent.co.uk/arts-entertainment/art/great-works/great-works-death-and-the-maiden-1915-16-by-egon-schiele-84562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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