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 셋. 프리다 칼로(Frida Kahlo)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혁명가, 프리다 칼로

by 고요
소아마비, 교통사고로 인한 30회 이상의 수술, 괴저, 폐렴, 폐색전증.
어떠한 고통도 이 예술가의 재능을 가릴 수 없었다.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혁명가, 프리다 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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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다 칼로의 유년시절, 그리고 가족

프리다 칼로(Magdalena Carmen Frida Kahlo y Calderon)는 1907년 7월 6일 멕시코시티 교외에 위치한 코요아칸의 파란 집((La Casa Azul (The Blue Hous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Guillermo Kahlo, 1872-1941)는 독일 태생으로, 헝가리계 유태인으로 알려졌으나 2005년 발간된 전기에서 독일 루터교의 먼 후손임을 명시한 바 있다.


1891년, 열 아홉살의 나이에 멕시코로 이주해 온 프리다의 아버지는 독일식 이름인 빌헬름에서 스페인식 이름인 기예르모로 개명했다. 나치즘이 등장했던 1930년대 후반, 프리다는 자신의 이름이 독일어로 평화를 나타내는 "Frieden"에서 따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스페인 혈통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 출신인 어머니 마틸데(Matilde Calderon y Gonzalez)는 기예르모의 전처가 둘째 아이를 낳다 사망하자, 바로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 좋지않은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네 명의 딸이 있었고, 프리다가 셋째였다. 여자들만 바글거리는 집안에서, 프리다는 특히 아버지와 가깝게 지냈다.


프리다 칼로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 쪽 다리가 더 가늘어졌기 때문에 항상 긴 치마로 다리를 가리고 다녔다. 그러나 복싱과 다른 스포츠를 즐겨하는 등 씩씩하게 자라나 1922년, 국립예비학교(Preparatoria)에 입학하였다. 프리다는 대학에 입학한 단 35명의 여학생 중 하나였고,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Self-Portrait-1932-large.jpg?type=w966 Self Portrait 1932


■ 화가 경력

저는 제 모습을 주로 그렸어요. 왜냐면 병실엔 거의 저 혼자였고,
저 자신은 제가 가장 잘 아는 주제였으니까요.

열 여덟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큰 부상을 입은 프리다는 의학 공부를 접고 전업 화가로 돌아섰다. 사고 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병상에 앉아 주로 자화상을 그렸다. 어머니는 병상에서 쓸 수 있는 특별한 이젤을 만들어 주었고, 아버지는 유화 물감과 붓을 마련해 주었다.


그녀의 전 작품 143점 중 55점이 자화상이었는데, 자화상은 프리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훌륭한 도구가 되어 주었다. 자화상 외에도 결혼, 유산, 수술 등 개인적 경험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저는 이상보다는 현실을 그리죠."


또한 멕시코 토착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아 밝은 색채와 드라마틱한 상징을 작품 안에 그려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종종 멕시코 신앙에서 탐욕을 의미하는 원숭이를 그리기도 했는데, 프리다는 원숭이를 신앙적 의미와는 달리 여리고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묘사했다. 기독교와 유대교적인 주제도 자주 그렸으며, 때로는 멕시코 전통과 결합하여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창조해 냈다.


1939년, 앙드레 브레통의 초대로 프랑스 파리에서 작품을 전시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그녀의 작품을 사들였고, 프리다는 멕시코 화가 최초로 세계 유명 박물관에서 작품을 구입한 화가가 되었다.

Portrait-Of-Diego-Rivera-large.jpg?type=w966 Portrait Of Diego Rivera


■ 폭풍같은 결혼 생활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에게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디에고는 독특한 화풍과 멕시코인 특유의 감성을 지닌 프리다의 재능에 매료되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둘의 사이는 가까워져 1929년, 마틸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기예르모는 이 부부를 코끼리와 비둘기에 비유하곤 했는데, 둘의 체격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둘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양성애자로 유명한 프리다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불륜을 저질렀으며, 디에고는 프리다의 막내 여동생인 크리스티나와 바람을 피웠다. 결국 둘은 이혼을 했으나 1940년에 다시 합쳤고, 이후에도 별거와 동거를 반복했다.

■ 말년의 삶
공산주의자였던 프리다와 디에고는 러시아의 전략가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프리다는 소련의 스탈린 체제로부터 도피해 정치적 피난처를 찾고 있었던 트로츠키를 자신의 집에 들여 머물게 해 주었으며, 같은 시기 트로츠키와도 한 차례 바람을 피운다. 이후 트로츠키 부부는 코요아칸의 다른 장소로 옮기게 되는데, 거기서 암살으로 최후를 맞이한다.

Viva-la-Vida%2C-1954-large.jpg?type=w966 Viva la Vida, 1954


■ 죽음

I hope the exit is joyful - and I hope never to return - Frida

죽기 몇 일 전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이 삶으로부터의 탈출이 부디 즐겁기를 - 그리고 영원히 이 세상에 되돌아 오지 않기를 - 프리다 (I hope the exit is joyful - and I hope never to return - Frida).


공식적 사인은 폐색전증이었으나, 일부에서는 약물과다복용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검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괴저로 인해 오른 쪽 발을 절단한데다 폐렴까지 겹쳐 빠르게 노쇠해진 프리다는 1954년 7월 13일, 고통속에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의 남편 디에고는 자서전에서, 프리다의 죽음을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으로 꼽았으며, 너무나도 늦게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날들이 생에 가장 기쁘고 멋진 날들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프리다의 유골은 그녀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코요아칸의 파란집(La Casa Azul (The Blue House))에 안치되었으며, 오늘 날 파란집은 그녀의 작품과 함께 개인적인 유품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출처: http://www.frida-kahlo-foundation.org/biograph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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