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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Jul 15. 2017

심리학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 #22 가위손

누가 에드워드를 히키코모리로 만들었을까

가위손의 탄생
옛날 옛적에, 한 과학자가 살았습니다. 외딴 성에서 홀로 외로움을 달래던 과학자는 결국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인간의 형상을 한 피조물을 창조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그러나 과학자는 귀여운 에드워드에게 손을 만들어 주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 안에 홀로 남은 가여운 에드워드는, 인간의 손과는 전혀 다른 가위 손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창백한 얼굴에 빼빼마른 몸. 긴 다리, 그리고 가느다란  팔 끝에 매달려 있는 가위들... 우리가 알고있는 가위손 에드워드는, 이렇게 과학자의 손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절대 인간은 아닌. 그렇다고 괴물이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하리만치 인간적인 피조물. 인간과는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성 안에 갇혀 고립된 채 살아가던 외톨이. 지금부터 가위손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과학자의 피조물과 신의 피조물들이 만났을 때

화장품을 팔기 위해서라면 지구의 끝이라도 간다! 못말리는 화장품 외판원 펙은 화장품을 홍보하기위해 이곳 저곳 안다닌 곳이 없을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다. 어느 날, 마을에서 동 떨어진 외딴 성까지 다다르게 된 펙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에드워드를 만나게 된다.


무시무시한 외형과는 다르게 어딘지 순수한 구석이 있는 가위손 에드워드. 단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외딴 곳에 홀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에드워드에게 동정심을 느낀 펙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무엇이든 제 손에 닿으면 상처를 입고마는 탓에 에드워드의 얼굴은 상처와 흉터가 가실 날이 없다. 펙은 자신의 전공분야를 살려 기가막히게 상처들을 가려주지만, 상처는 숨길수록 곪는 법. 에드워드의 얼굴은 밀가루 반죽처럼 희멀겋게 변하여 더욱 우스꽝스럽게 변해버리고 만다.



오랜 시간동안 홀로 살아온 에드워드에게는 문명의 모든 것이 생소하다. 인간들이 습관처럼 사용하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가위손엔 어울리지 않고, 이런 이유로 에드워드는 《군중속의 고독》을 느끼게 된다. 외딴 성이나 북적거리는 마을이나 에드워드는 외롭게 살 운명인가 보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한 에드워드에게 호감보다는 호기심을 느낀다. 그러나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도 않을 뿐더러 어떨 땐 무례하기까지 하다.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구경거리로 전락한 에드워드는 더욱 외로워 지고 만다.


군중 속으로, 가위손이 설파한 브나로드 운동

외롭기 그지없는 에드워드. 그를 동네에 발붙이고 살아가게 해 준 원동력은 아름다운 금발 미녀 킴 뿐이다. 그녀의 곁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마을 사람들에 동화되어야 한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가위손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어주거나, 머리를 손질하는 일 등 가위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 본다.


점점 사람들은 에드워드의 기술과 순수함을 알아봐주고, 외형이 다르다고 차별해선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치솟는 인기덕에 TV에도 출연할 정도로 주목받는 에드워드. 에드워드는 제 스스로 자신은 별다른 바 없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존재임을 설파한다. 자신의 흉측한 손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된다는 것, 그리고 본인은 누구든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당당히 드러낸 것이다.


그의 노력덕분에 사람들은 <계몽>되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편견을 떨치고 모든 존재를 포용할 수 있는 관대함이라는 것에 눈을 뜨고,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며 이방인 에드워드를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준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그를 시샘하는 무리들 역시 존재한다. 에드워드가 킴에게 관심을 보이자, 킴의 남자친구인 짐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짐은 나쁜 짓에 순수한 에드워드를 끌어들여 이용하고, 그가 하지도 않은 일로 모함까지 하면서 못살게 군다. 또 다시 상처받은 가위손 에드워드. 그는 그의 숙명대로 다시 혼자인 삶으로 돌아간다.


누가 그를 히키코모리로 만들었나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황지우 시인, <뼈아픈 후회>중


무엇이든 가위손이 지나가면 상처를 입고, 그 상처는 지독한 흉터로 남는다. 가위손 본인도 예외없이 얼굴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수두룩하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그와 가까워지려는 모든 호의들에 상처를 내고 마는 날카로운 손. 그래서 그는 언제나 서글프다.


그러나 잠깐의 마을 생활에서도 증명되었듯이, 분명히 가위손이 우리 사회에 적응하고 살 수 있는 방법들이 많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혹은 자신은 운 좋게 남들과 같다는 이유로 <이방인>의 절규를 무시해 버린다.


아버지와도 같은 과학자가 죽고나서 오랜기간 상실감과 우울감을 경험했던 에드워드. 남들과는 다른 손 때문에 성 안에서 갇혀살며 햇볕은 구경도 못해보고, 남들은 모두 잠든 새벽녘에나 나와 꽁꽁 언 얼음 덩어리들을 아름답게 조각하는 것이 유일한 낙인 가위손 에드워드. 이 불쌍한 에드워드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대인 관계는 무너져 버리고, 자존감도 떨어져 버린다.


그러나 수년만에, 화장품 외판원 펙이 그가 살고 있는 외딴 성으로 찾아왔을때, 혹시나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어 기뻐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즉약, 약즉독이라고 했던가. 그에게 한 껏 세로토닌을 분비하게 만들어 주었던 <마을행>은 오히려 독약으로 다가왔다. 사람으로 회복한 상처가, 또 다시 사람때문에 깊어지기 시작했다.


왜 그는 계속 혼자가 되는 것일까? 나는 마침내 가위손을 성 안의 히키코모리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사람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가위손, 그에게 꼭 인간의 손이 필요할까?

우리 사회에도 가위손과 같은 <이방인>들이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성별, 인종, 출신, 외모 등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항목들까지 줄줄이 엮어 새로운 이방인을 만들어 낸다. 핍박하기 위해서다. 다른 한 편으로는 기존의 공동체를 더욱 견고하게 결합시키기 위해 공공의 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관용과 덕을 베풀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모든 약자들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인데, 대부분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기 싫어서 약자를 착취하고 이방인으로 규정하여 무력화 시켜버린다.


결함이나 장애는 누군가를 이방인으로 규정하기 위한 아주 좋은 증거가 된다. 어쩌다 운좋게 남들과 똑같은 모습을 했다는 이유로, 조금이라도 다른 누군가를 타겟삼아 물고 뜯는 자들. 그들은 강자가 아니라 단지 비겁한 사람들일 뿐이다.


지금 가위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과 같은 모양의 손? 그 것이 일반인들에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는 프리패스가 될까?


아니다. 그 대신에 우리가 가져야 할 것들이 있다.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성숙함, 그리고 사회의 다양성을 이해할 수 있는 관용. 팔 끝에 가위가 아니라 전기톱이 달려 있더라도 차별하지 않는 정의가 필요하다.


다름이 틀림으로 규정되지 않는 사회. 특별한 것이 비정상적인 것과 평행하지 않는 사회. 가위손이 히키코모리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으로 그 존엄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그것을 위해서는 꼭 인간의 손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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