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생은 여행과 닮았다. 그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뜻이다. 여행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나로서는 멀리서 보면 한량 같아 보이기도 하고, 자유로워 보이기도, 한심해 보이기도 했었다. 분기별로 제주 여행을 떠나고, 잠잠하다 싶으면 해외여행 사진들을 sns에 왕창 올리고, 우울하다고 부산에 가고, 행복하다고 강원도를 가고, 잘 살고 싶어질 땐 경주를 가는데 그렇게 보이는 게 당연하겠구나 싶다.
여행은 내 삶에서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첫 시작은 도피였고, 두 번째는 흠뻑 느껴버린 자유를 잊을 수 없어서였고, 사랑, 추억, 사랑, 자유, 사랑, 기억, 가끔은 도피, 사랑, 또 가끔은 의무, 사랑, 위로, 사랑, 일상 그리고 결국엔 사랑이었다. 동행이 누구냐에 따라 좋고 싫음이 나뉠 여행이었다면 애초에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의 이유였던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함께 떠날 수 없었다. 과연 이 글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몇 번 등장할까. 난 여행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사랑을 말하고 싶은 건지 헷갈린다. 여행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여행한다는 건 같은 의미일까. 매일 궁금증만 늘어간다.
여행하는 이는 단단하다가도 쉽게 깨진다. 사랑하는 이 역시 쉽게 깨지는 가 싶다가도 금세 단단해진다. 놀랍게도 평행을 이루는 이 두 가지 요소를 함께 사랑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더 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시작한 것이 없어서 아무것도 끝낼 수 없었던, 스페인
스페인 그라나다의 한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억지로 쥐어주는 관광지도를 받아 들고 길을 나선다. 스페인 남부의 유명하지 않은 작은 도시에 거주 중이었지만, 맘 잡고 여행을 떠나온 적은 처음이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구글 맵과 거추장스러운 종이 지도를 번갈아보던 양 미간이 한껏 찌푸려진다. 그때 낯익은 소리가 귓가에 스친다.
"저기, 혹시 한국인이세요?"
평소 낯가림이 심한 편이지만, 오래간만에 들린 한국어에 반색을 하며 그렇다고 대답한다. 강하게 내리쬐는 스페인의 자비 없는 태양빛에 한껏 찌푸려진 미간도 그를 보는 순간, 잠시, 밋밋해졌다.
'내가 스타벅스에서 난생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 앉았던 적이 있던가?'
생각을 하며 잠자코 음료만 마시는 나에게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본다.
"저는 여행 중이에요."
'그러시겠지.'
라고 또 혼자 생각한다.
"원래는 친구와 둘이서 유럽여행을 하려고 했는데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취소하기도 뭐해서 그냥 혼자 이곳저곳 다니고 있어요. 오늘은 그라나다에서 마지막 날인데 한국인을 만나니 반갑네요."
'어련하시겠어요.'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나는 혼자 주절거리는 상대방에서 관심을 거두고 음료 컵 겉면에 맺히는 물방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혼자 여행하면 다 좋은데 음식 먹는 게 좀 아쉽더라고요. 먹고 싶은 건 많은데 제 위는 한정되어있으니.."
"아... 네.... 그렇죠..."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식당 안 가실래요? 여기서 얼마 멀지도 않고 음식도 꽤 훌륭하다고 해서요."
드디어 시선이 물방울에서 상대방으로 옮겨졌다. 꽤 훌륭하다는 식당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던 것일까.
"페르동이라고 알아요?"
"아뇨. 그게 뭔데요."
"제가 사람들 얘기하는 거 유심히 지켜봤는데 무슨 말 할 때 앞에 붙이더라고요. 예를 들면 주문할 때라든가, 뭐 물어볼 때."
"아, 뻬르돈"
"아니, 페르동이라고 하던데."
"네. 뻬르돈. 실례한다는 뜻인데. 영어의 pardon 같은."
"내가 들어봤을 땐 페르동이었어요. 저기요, 페르동!"
본인이 들었다고 주장하는 그 언어로 보란 듯이 바로 점원을 불러대는 그 남자가 조금 꼴 보기가 싫었다. 그러다 곧 땀을 뻘뻘 흘리며 이것저것 주워들은 스페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열심히 물어보고 주문하는 모습이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아주 아주 아주 조금.
스페인 식당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나름 철저하게 그라나다 사전조사를 마쳤다 생각했던 하진에게 그 식당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음식이 기대 이상으로 맛이 있었고, 몇 번씩이나 페르동을 외쳐대는 그 역시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기 때문에.
같은 방에 한국인이 한 명 머물고 있었다. 자신은 갑갑한 대학과 취업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 세 달간 배낭여행을 떠나왔다며 묻지도 않은 정보들을 내뱉던 그는 대뜸 혼자 가기에는 먹고 싶은 음식이 많은 식당이 있다며 같이 가지 않겠냐고 했다. 침대에 누워서 저린 다리를 주무르고 싶었지만 딱히 거절할 핑계가 생각나지 않아 하는 수없이 따라나선다. 그저 오늘은 낯선 이들과의 인연이 잦다, 싶었다.
가벼운 칵테일 두 잔에 얼큰해진 뒤 숙소로 돌아와 외출복을 입은 채 잠시 망설이다 침대에 풀썩 누워버린다. 내 집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니 왠지 모를 죄책감과 자유로움 그 어딘가에 머무른다. 몽롱한 상태로 귀에 이어폰을 밀어 넣고 일기를 가장한 끄적거림을 시작한다. '오늘, 그라나다, 이상한 남자와 맛있었던 식사, 룸메이트 지연, 더럽게 비싼 칵테일, 맛있었던 미트볼. 근데 그 남자 진짜 이상하고 웃겨.'
이틀짜리 룸메이트 지연은 오후에 타파스 투어 일정이 있다고 했다. 타파스 투어. 음료를 주문하면 다양한 한입거리 안주들이 나오는데 서너 군데 타파스 식당을 다니며 저렴하게 한 끼를 해결하기 좋아 관광객들에게서 유명하다. 열명 정도 모인다고 해서 지연은 한껏 상기된 모습이었다.
"같이 가자 언니. 혹시 모르잖아. 거기서 내 운명을 만나게 될지. 나 괜찮은 사람 있으면 도와주는 거다?"
운명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제 본 그 남자가 떠오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낯선 이들이 많은 곳은 원체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쭈뼛거리며 지연의 뒤를 따른다.
"언니, 오늘은 정말 재미있을 거야. 내 생에 열 손가락 중 손꼽히는 밤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확실해."
쉴 새도 없이 재잘거리는 지연의 시시껄렁한 농담에 실소를 터트리며 가던 시선 끝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 남자였다. 분명 어제 떠난다고 했는데, 몸이 고장 나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야경을 보러 가자고 누군가가 얘기했다. 날이 어둑해지며 익을 듯했던 지면의 열기가 사그라들었고, 걷기 좋은 시간이라는 생각에 순순히 따라나섰다. 물론 그도 함께. 몇몇은 내일 일정이 일찍부터 시작된다며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지연이 같이 야경을 보러 갔는지, 숙소에 들어갔는지, 아니면 누군가와 사라졌는지는 이미 안중에 없었다. 아무튼 남은 이들은 편의점에서 커다란 맥주 하나씩 사들고 성 니콜라스 성당을 올랐다. 마침 좋은 사진기를 가져온 이가 있어서 우리는 황홀한 야경을 배경으로 젊음을 기록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언니는 하필이면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와서 몇 번이나 삐끗 댔다. 여행하러 와서는 무슨 뾰족구두인가 싶던 내게 언니는
"이런 게 내 수법이고, 방식이야."
라며 남자들을 마구 홀려대는 웃음을 지어내 대번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마터면 본인까지 넘어갈 뻔했으므로. 성 니콜라스 성당 꼭대기에서 뿜어대는 알코올과 섞인 이산화탄소들이 없었다면 그날 그 여름밤은 훨씬 적적했을 것이 분명하다. 후덥지근하고 끈끈한 여름 바람에 어떻게든 영글어지는 청춘들이었다.
어느새 옆엔 그 사람이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은 참 많은 얘기를 했던 것도 같다. 옆방 룸메이트가 하루가 멀다 하고 제 남자 친구를 데려와 온 집안 살림이 부서질 정도로 관계를 한다는 것, 그 전 룸메이트는 가끔 숨죽여 울곤 했는데 그럴 땐 또 마침 집이 너무 고요해 지금 룸메이트의 그것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는 것, 그럴 때면 미처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옆방에서 나까지도 같이 울어버리게 됐다는 것, 근데 사실 적당한 위로는 핑계고 그를 품어줄 넉넉한 품이 못 되어서 더 미안했다는 말, 유학생들은 문란하다는 소문을 줄곧 들어왔었는데 주변 사람들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순 엉터리는 아닌 것 같다는 뭐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그렇게 그들은 정처 없이 걸었다. 당장 걷지 않으면 죽어버릴 사람들처럼, 걸으면 걸을수록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떠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걸어댔다. 타국의 노오란 가로등 불빛과 습기를 한껏 머금은 새벽 공기가 이토록 아름다웠는지 왜 미처 몰랐을까, 하고 생각하며 걸었다.
그날 뒤로 여행하는 동안 그와 매일 만났다. 곁에 사람을 잘 두지 않는 본인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잘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멀고 먼 타지에서의 인연은 어디까지나 우연으로 남기는 편이 서로에게 좋음은 분명하였기에. 나는 다시 공부하던 남부의 작은 도시로, 그는 이탈리아로 각자의 길을 떠났다.
꿈 같았던 이 주간의 여행이 끝났다. 다시 스페인의 한가로운 작은 도시로 돌아와 평소처럼 공부를 하고, 늘 가던 카페에 가서 추로스와 커피를 마셨고, 매일 장을 볼 때 변비를 해소하기 위해 채소와 요거트를 샀다. 그전과 다른 점은 자주 그를 생각했다는 것과, 더 자주 그가 그리워졌다는 것뿐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업을 마치고 트램을 타고 집에 가는데 유난히 바다가 보고팠다. 목적지보다 세 정거장 먼저 내려 천천히 걷는다. 캐치볼을 하는 가족, 나란히 태닝을 하는 커플, 한 손엔 지팡이 나머지는 서로의 손을 잡고 걷는 노부부, 밀려들었다 금세 쓸려내려 가는 파도. 밀려들어왔다가, 빠져나간다. 다시 물이 찼다가 하얀 거품을 내며 사라진다. 또 차올랐다 사라져 버리고. 멍하니 그 과정을 지켜보는데 왜 눈물이 맺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고 눈알을 굴리며 눈물을 애써 참는데 불쑥, 뭔가가 시야를 침범했다.
그는 이탈리아행 비행기를 흔들며 웃었다.
"와, 여기 이탈리아보다 훨씬 좋은데? 물론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아."
그는 그날로 근처에 머무를 숙소를 구했다. 볕이 아주 잘 드는 것이 따스한 그와 꼭 맞는 장소였다. 그 집엔 점점 두 사람의 물건이 쌓여갔다. 그리고 집을 나오기 전, 하진은 옆방의 예의 없는 룸메이트에게 복수를 했다. 그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이번에 똑똑히 알았으리라. 나름 통쾌한 복수였다.
본격적으로 두 사람이 같이 살게 된지는 그가 온 지 정확히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지났을 때부터였다. 평소처럼 낮이면 어학원에 가고, 늘 가던 카페에 가서 추로스와 커피를 마셨고, 채소와 요거트를 샀다. 하지만 옆에는 그가 있었고 뭐든 두 개 씩 주문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라나다에서 만났던 언니가 지었던 웃음을 지을 때면 그는 박장대소를 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안 어울리는 표정은 처음이라며, 마구 웃어댔다. 애초의 목적과는 달랐지만 어찌 됐거나 그가 웃었다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나날들이었다. 내 생일엔 평소 엄두도 못 냈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그의 생일엔 생일 상을 차리느라 자그마한 부엌이 폭탄을 맞은 듯했다. 어느 날의 밤에는 띤또와 안주들이, 또 다른 날엔 시원한 밤 산책이 그들을 가득 채웠다. 수업이 없는 날엔 유럽 인근 도시로 여행을 떠나고,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과 처음 보는 풍광들과 함께 뒤섞여 다양한 날들을 지치지도 않고 겪어댔다.
그렇게 서로를 채워가던 몇 개월이 끝나갈 즈음에 그는 귀국을 해야 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오래 머무르기도 했고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런 삶은 행복했지만 희망적인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떠나는 날 그는 말했다.
"한국에서 다시 만나. 기다리고 있을게."
"응."
그렇게 그는 떠났고, 그 뒤로 많이 괴로웠고 아팠다. 이 관계와 감정을 정의하기가 힘들었고 두 사람의 앞날이 그려지지가 않아서, 또 이런 일이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한 여름밤의 꿈 같이 아득해서 그 괴리감에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결심했다. 그에게 그저 그런 문란한 유학생으로 남자. 나는 그와 아무것도 시작한 게 없어서 끝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와의 모든 것을 혼자 정리하고 다시 이전의 평범한 유학생으로 돌아갔다. 우는 횟수도 줄어들고 1인분을 챙기는 것이 익숙해질 때 즈음 그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한국에 돌아와서도 일상은 그대로였다. 그저, 그를 만나기 이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새로이 번호를 개통하고, 새롭게 구한 직장 인근에 집을 구하고, 여전히 채소와 요거트를 종종 샀으며 카페에서 커피를 즐겼다. 평소 같던 어느 날, 길을 걷다 저 앞 사거리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와 많이 닮았다. 심장이 마구 널뛰었고 반대로 몸은 굳은 듯 경직됐다. 그와 닮은 것이 아니라 완벽히 그 사람이었다. 무언가에 깊이 골몰한 표정으로 걷는 그를 보고 급하게 뒤돌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던 길인지도 잊고 반대방향으로 그렇게 그렇게 계속 걸었다. 걷다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와 아무것도 시작한 게 없어서, 아무것도 끝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주저앉아 혼자 끝내지 못한 어떤 조각을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말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제가 여러분과 말장난해서 뭐하겠어요.
사랑자의 여행은 단순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느 곳에 있던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오고 싶고, 함께 하고픈 그리운 사람들이 가득한 것이 사랑자의 여행이라는 것. 이런 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이란 말인가. 사랑자는 오늘도 이름 모를 외딴 여행지에서 사랑을 가득 담아 당신에게 보낸다. 무사히 잘 받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