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해서 더 좋은 것

by 고요

나는 그 애를 애정 한다. 여섯 살 꼬마 때부터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는 안은 내 유일한 남자 사람 친구이기도 하다. 전에는 나름 그런 게 많았던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안 뿐이다. 연락을 안 한지 일 년이 넘었어도 그가 내 친구인 것은 변함없다. 굳이 말하지 않고 면밀히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안에게 자주 말해야 했다. 그는 나를 자주 상처받게 했고, 심지어 본인은 그 사실조차 전혀 몰랐으니까 나는 참고 참다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잃고 싶지 않았기에 굳이 꾸역꾸역 말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안과 나는 여섯 살 때 옆 동의 동갑내기 친구로 만났다. 안은 4월생이고 나는 1월생이라 거의 일 년이 차이나는 탓에 하마터면 동급생이 되지 못할 뻔도 했지만 어찌어찌 우리는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그리고 각자 다른 대학교와 사회인의 생활을 옆 동 친구로 끈질기게도 견뎌냈다. 그래서인지 내 모든 학창 시절의 졸업앨범에 그 애가 있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든든한 일이기도 했다.


잃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말에는 잃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나는 매번 엄청 소중한 것에는 그 무언가를 잃을 준비를 하면서 말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게 굉장히 아이러니해서 아직까지도 어느 것이 맞는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잃어도 괜찮은 것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놔두면 자연히 잃어지거나 다시 얻어진다. 하지만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아서 내뱉는 말은 긴 호흡이 필요하다. 잃고 싶지 않지만 잃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는 늘 그랬다. 이십 대 초반의 어느 날, 안의 어떤 점이 나는 몹시도 분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오랫동안 고민하고 몇 번이나 말을 고친 뒤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그때의 내 심정은 안이 다시는 내게 그러지 않아줬으면 하는 마음과 앞으로는 안을 못 볼 각오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함께였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 당시 나는 친구가 지금보다는 배로 존재하던 시절이었고, 어렸고, 그래서인지 그를 두 번 다시 안 볼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감정을 이야기하고 난 뒤의 안은 다음 만남 때 내게 편지를 써주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안을 잃으려는 내 다짐은 깡그리 무산되고 쉽게 감동받는 나는 어마어마한 감동을 받게 되는 그런 행복한 결말이다. 그 편지를 찾으려면 찾을 수 있겠지만, 우리 둘 다 그다지 좋아할 내용이 아닌 것 같아서 하나의 해프닝으로 이렇게나마 남겨본다.


나는 내향형 인간이지만 안은 오백 미터 밖에서 봐도 외향형 인간이다. 그는 친구가 많고, 항상 누구를 만나고 뭘 해내느라 바쁘다. 그래서인지 안은 자주 내 생일을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나는 그것이 제법 서운함에도 몇 년을 군소리 없이 지내왔는데, 또 어느 날은 말해야 되겠어서 말했다. 안의 생일이 있고 며칠 뒤 내가 근사한 밥을 사주기로 한 날이었다. 맛있고 비싼 밥을 가득 사 먹이고 커피까지 다 마시게 한 뒤 안에게 혹시 내 생일은 언제인지 알고 있냐고 물었다. 안은 곧바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또 괜찮다고 한다. 괜찮지 않았지만 그냥 괜찮다고 해야 한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말은 해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좋아하는 날들 중에 생일이 있는데, 그중 하루만이라도 네가 함께였으면 좋겠어. 거창한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면 돼. 좋아하는 날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끼어있으면 하는 마음, 그뿐이라." 그 뒤로 안은 내 생일을 잊어버린 적이 없다. 사실 두어 번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있다. 그거면 됐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을 수 있을까'라는 흔한 질문에 나는 늘 안을 떠올린다. 안은 나 말고도 떠올릴 사람들이 몇 더 있을지 모르나 나는 유일하게 한 사람만 떠올린다. 물론 나는 안을 사랑한다. 내가 화낸 다음 날 손 편지를 써주는 사람을, 나를 세상 밖으로 몇 번이고 꺼내 주는 그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과 우정은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갖게 해 준 그를 보며, 이보다 더 또렷하게 '친구'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십 년이 지나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상호 간의 우정보다 중요시되는 것들이 늘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렇지만 지금 안과 나의 관계에서는 그 우정이 바래지 않게, 먼지가 쌓여 꺼내기 꺼려지지 않게 잘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보다 조금은 구깃하고 낡아 보이는 것들이 가끔은 더 예뻐 보이는 법이니까.




내 주변 사람들은 겹치지 않으면서도 저마다의 특색을 가진 이름들이라 쓰는 사람으로서는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의 주인공인 천도 그러하다. 천에게는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에 그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함이 있다.


천은 고등학교 일 학년에 만나 지금까지도 일 년에 한 번 이상을 꼬박 만나는 사람이다. 천의 첫인상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나는 천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만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천은 마냥 솔직하지는 않은 사람이다. 솔직하지 않지만 솔직한 사람. 매사에 솔직하지는 않지만 그 내면을 다 읽을 수 있어서 하는 말이다. 이십 중반의 나는 천에게 원나잇 하는 건 너무너무 별로라고 얘기했던 적이 있다. 그때 천은 누가 봐도 원나잇을 해 본 사람의 얼굴로 나 역시 그런 건 별로.라고 했었다. 천이 진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정말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천이 원나잇을 했다고 해도 난 천을 너무너무 별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때까지는 별로인 사람들이 원나잇을 했었는데,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더 많이 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말이다. 그들이 내 편견에 갇혀 본인을 속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굳이 나에게까지 좋은 사람이고자 꾸미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생각이 쉽게 바뀌는 사람이고, 애초에는 편협한 사람인 데다가 그걸 숨기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치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천은 엄청 솔직한 사람에 속한다. 시험을 망쳐서 속상함과 실망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사람, 가족에 대한 감정을 조심스럽지만 담담하게 얘기하는 사람, 고마우면 고맙다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어려우면 어렵다고 숨김없이 말하는 사람이다.


천은 나를 후순위로 두는 사람이다. 다른 친구들을 만나고, 연인을 만나고, 가족을 만나고, 또 혼자만의 시간도 보내고, 그러고 나서 나를 만난다. 천에게는 챙길 것이 많아서 어쩔 수 없다. 동생이 네 명이나 있는 천 씨 가문의 장녀이기도 하고, 회사에서도 자신의 일을 똑 부러지게 해내야 하는 연차이기도 하고, 고등학생 때부터 꿈꿔왔던 문어다리는 결국 해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사랑도 착실하게 쌓아가고 있고, 워낙 친구도 많고 흥도 많아서 그들을 다 상대하고 몸을 부대껴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또 여행도, 사진도, 꾸미는 것도 좋아해서 도통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인데 바다 깊은 곳의 조약돌 같은 나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현명하다.


천은 나에게 비교적 잦은 빈도로 전화를 거는 사람이다. 콜 포비아인 내게 천은 자주 전화를 해댄다. 핸드폰을 못 봤을 때와 주저하다 받지 못했을 때, 이렇게 반반의 확률로 그의 전화를 한 번에 받은 적은 없다. 이 글이 천에게 닿게 된다면 천은 내가 콜 포비아라는 걸 그제야 알게 될 것이다. 알고 지낸 지 십 년이 넘는데도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안 한 나에게 천은 섭섭하기도, 미안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천과 역시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꼬박 통화를 하는데, 이건 나로서는 경이로운 일에 가깝다. 천을 매우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전화가 무섭지만 천은 무섭지 않다. 무섭지 않은 사람이 무서운 행동을 하는 건 조금 참아볼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는 덜 무서워지지 않을까 하는 용기를 준다.


나는 확실히 천을 좋아한다. 그는 매사에 열심히 하는 사람이고, 열렬히 사랑하고, 적당히 충동적이며, 적당히 솔직한 사람이다. 천과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지 않다. 그 장난기 가득 어린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천과 함께 겪어낼 앞으로가 전혀 두렵지 않다. 가끔 지칠지언정 놓치고 싶지는 않다.




최근 연과의 교류가 잦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친한 친구인 우리 사이는 꽤나 로맨틱하다. 연은 본인이 읽은 책에 코멘트를 달아 나에게 선물해주었고, 나 역시 새벽에 그에게 걸려온 전화 너머로 들려온 불안한 목소리에 대한 답으로 글을 써주었다. 연은 또 답글을 보내주고, 나도 내가 좋아하는 책을 선물하고. 그런 어떤 마음과 진심들의 반복이 이어진다.


그는 항상 불안하고 죽고 싶고 걱정하고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이야기를 하고, 나는 최대한 그걸 무시하고 괜찮다고 얘기하다가 모른척하기 바쁘다. 푸념과 딴짓이 창과 방패처럼 한치의 물러남도 없이 팽팽한 이상하고도 가련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연은 가진 것이 아주 많은데 그걸 모르고, 연이 생각하는 나는 가진 것은 별로 없으면서 마냥 행복해하기만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연과 함께 있다 보면 나까지 어둠에 잠식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노라면 나 역시 암울한 미래와 그보다 더 처참한 현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덩달아 주제 파악이 되어버린 나지만 연과 함께 가라앉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린 뒤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그러다 나쁜 생각. '그럼 넌 내가 죽고 싶었을 때는 어디 있었냐'라고 묻고 싶어 하는 나쁜 생각은 다행히 이젠 힘이 약해졌다. 다시 다른 생각.... 다른 생각....


어느 날 연이 "나는 요즘 전혀 행복하지 않아."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뭐? 너 지금 나랑 통화하고 있는 순간에도 전혀 행복하지 않단 말이야?"라며 장난을 쳐봤지만 연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행복하다는 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어." 사소한 것들에 쉽게 행복해하는 나는, 그렇다고 거대하게 행복해하는 것도 아닐 거면서 행복한 감정을 잊어버린 듯한 연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핸드폰 너머의 연은 어떤 표정이었을까. 스물일곱의 내게 보낸 문자에 올해의 목표는 오로지 행복하기였던 연은 스물여덟에도 행복을 찾지 못했다고 편지를 썼고, 스물아홉에까지 전혀 행복하지 않다며 말하고 있다. 연에게 행복은 어떤 것이길래 이토록 오래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자주 연에게 대답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입만 뻐끔댔다.


어느 날 같이 간 유명한 카페에서 연은 이 빵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저 빵은 뭐랑 뭐를 넣어서 만들고, 또 여기 있는 모든 디저트의 단가가 어떠한지를 알려주기도 했다. 내가 먹고 있는 빵과 케이크와 음료의 원래 가격을 들으니 조용히 포크가 놓아졌다. 방금까지도 풍부한 냄새를 풍기며 먹음직스러웠던 것들이 쳐다보기도 싫은 지경이 되었다. 그런 점들이 연의 습성과 몹시 닮아서 목구멍으로 넘기기 더 힘겨웠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직업병이라고 해도, 나는 연이 모든 디저트의 단가나 재료 같은 알맹이보다 좀 더 부풀려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래, 빵이 부풀어 오르는 그 형상처럼. 작은 덩어리였던 연의 무언가가 따듯한 오븐에서 예쁘게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상상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 부풀린 모습을 보고, 사고, 먹고, 기억한다. 그게 진짜일지도 모르는 건데 너무 진짜만 진짜라고 생각하는 연은 왠지 안아주고 싶다.


나는 아슬아슬하지만 항상 행복을 동경하며, 디저트를 볼 때마다 비평하는 연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그의 아슬아슬함 곁엔 든든한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을 테고, 연이 끝끝내 행복에 이르렀을 때 그게 얼마나 별 것 아니면서도 대수로운 일이었는지 마침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온전히 들어줄 내가 있을 테고, 자신의 진로와 직업에 대해 냉철한 생각에 깊은 고민을 더해 더욱 성숙하고 멋진 사람이 되어있을 테니까 현재의 연을 전혀 걱정하지도 않는다.


연을 보면 내가 더 큰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그의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나에게 내려놓고 쉬어가도 좋을 만큼 품이 넓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연이 다른 것 다 빼고 우리 얘기만으로도 아무 근심 없이 행복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연이 심연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지 않도록, 아니 내려가더라도 무사히 올라올 수 있도록 준비운동도 혹독하게 시키고 숨을 효율적으로 참는 법도 알려주고 싶다. 그전까지는 같이 휩쓸리지 않게 다른 생각.... 또 다른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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