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붓다선원 명상 집중수행 후의 단상

맛지마니까야 <파발수레의 경 M24>

by 고요사띠


거창 붓다선원 집중수행 중에 스님께 질문드렸던 이야기들이 마음에 계속 남았나 보다.

선한 원인을 쌓으면 결과는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 그런데 오늘 파발수레의 경을 우연히 낭독으로 듣다가, 계속 곱씹으며 그 의미들을 아로새겨 보았다. 나에게 너무나 와닿는 이야기였다.

그 위대하신 사리뿟따가 지혜로이 만따니뿟따에게 계속해서 묻지만, 만나따니뿟따는 계속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 어떠한 대답도 드리지 않았다.

결국 선한 원인은 그 원인을 통해서 또한 그것들이 받쳐주고 받쳐주어서 이르게 되는 길인 것이다. 이것은 진경스님께서 이야기하셨던, 계행을 잘 지키며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숨을 알아차리는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하셨던. 나는 업의 주인으로서 그 선한 업을 이어가며 나아가고 있는가, 그것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은 우레따 스님의 <짐 진 자들> 중에서 마음을 닦지 않는 이상, 마음은 늘 불선업 쪽으로 기운다는 말과도 다시금 아로새기는, 그러한 지점에 대해 생각하던 오늘이었다. 이처럼 화두는 계속해서 연결 지어져 파발수레의 경으로 나를 이끌었나 보다.


사리뿟따 존자와 만따니뿟따 존자와의 대화 중에서


파발수레의 경 (맛지마니까야 M24) 중에서

도반스님이시여,
계행을 청정하게 하는 것 혹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등 일곱 가지로 움켜쥠이 없는 완전한 그침에 이르는 길에 대해 물어도 스님은 아니라고 대답하시고 또 그 외에 다른 길이 있냐고 물어도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십니까?

도반스님이시여, 세존께서 만약 계행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움켜쥠이 없는 완전한 그침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치셨다면 움켜쥠이 있는 것으로 움켜쥠이 없는 완전한 그침에 이르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나머지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만약 이러한 것들을 제외하고 다른 방법으로 움켜쥠이 없는 완전한 그침에 이르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올바로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일반 범부들도 움켜쥠이 없는 완전한 그침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알기 쉽게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지혜로운 자라면 그 비유를 듣고 제가 말한 의미를 이해할 것입니다.

도반스님이시여, 예를 들어 꼬살라국에 사와티성에 사는 빠세나디 왕이 변방에 사케다 성에 어떤 급한 용무가 생겨 그것을 위해 사와티성과 사케다성 사이에 일곱 개의 팔발수래를 설치했다고 합시다.
빠세나디왕은 사와디성의 성문에서 첫 번째 파발수레를 타고 두 번째 파발수레가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다시 두 번째 파발수레를 타고 세 번째의 파발수레가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왕은 이렇게 해서 일곱 번의 파발수레를 이용해 사케다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왕이 사케다성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만약 사람들이 대왕은 이 수레를 타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대왕은 어떻게 답해야 옳겠습니까?
빠세나디왕은 첫 번째 수레를 타고 사와티성에서 두 번째 수레가 있는 곳으로 왔고 거기서 다시 두 번째 수레를 타고 세 번째 등 이렇게 해서 일곱 번째 수레를 타고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맞습니다. 도반스님이시여,

그것처럼 계행을 청정하게 함으로써 마음의 청정에 이르고,
마음의 청정을 통해 견해의 청정에 이르고,
견해의 청정을 통해 의혹을 해소하는 청정에 이루고,
의혹을 해소하는 청정을 통해 수많은 길 중에서 열반에 이르는 참다운 길을 알고 보는 것에 청정에 이르고,
수많은 길 중에서 열반에 이르는 참다운 길을 알고 보는 것에 청정을 통해 참다운 수행의 길을 알고 보는 것이 청정해지고,
참다운 수행의 길을 알고 보는 것이 청정해져서 알고 보는 것에 청정함에 이루고,
알고 보는 것에 청정함을 통해 움켜쥠이 없는 완전한 그침에 이르게 됩니다.

도반스님이시여, 이와 같이해서 움켜쥠이 없는
완전한 그침을 위해 세존을 따라 성스러운 수행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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