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그만둔 후 가장 먼저 피아노 학원을 등록했다. 피아노를 못 배운 것이 한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런데 아직도 뚜렷한 추억 조각들이 피아노를 배우라고 이끌었다.
10살 무렵 여름이었나.
한 친구의 피아노 발표회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발표회장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정가운데 공주님 같은 드레스에 어른 화장까지 한 친구가 꽃다발을 잔뜩 들고 있었고 그 왼쪽엔 친구의 엄마가, 그리고 다른 쪽엔 내가 서 있었다. 부럽거나 시샘했던 기억은 없다. 집에서 걸어서 30분 가야 하는 거리를 그 발표회에 초대받았다고 좋아서 기꺼이 찾아갔다.
그 해 겨울인가.
또 그 친구의 다른 발표회에 초대받아 갔다.공주님같이 차려입은 그 친구가연주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또 같은 구도의 사진을 기념으로 촬영하고 어두워진 밤거리를 걸어 집에 도착했다.
엄마가 화가 많이 나있었다.
빗자루를 손에 들고 내 종아리를 때리셨다. 너무 늦게 들어와서 화가 나셨던 걸까? 남의 피아노 발표회 따라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속상해서 그러신 걸까? 피아노 학원 보내달라고 할까 봐 선수 치신 걸까?
고등학교 때 음악 실기시험의 주제는 자유 악기였다. 난 아마도 하모니카를 불렀던 것 같다. 집에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하는, 학교 수업에 필요한 악기들 중 하나였기에.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친구들은 피아노를 쳤다. 악기를 준비해오지 않아도 되는 편리성과 공주님 같아 보이는 효과성이 있기에. 몇 아이들이 내게 왜 피아노로 시험을 보지 않는지 물었다. 피아노를 못 친다는 내 말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내가 피아노를 칠 것 같아 보인다는 그 말이 기분 좋았다.
피아노를 정말 치고 싶은 것인지 피아노 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피아노 학원을 등록했다.
피아노 수업을 시작한 첫날.
개별적으로 구분된 공간에 피아노가 한 대씩 있었고 빈 방에 들어가 앉았다. 다른 방에서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성분이 먼저 지도를 받고 있었다. 왠지 10년 정도 고시공부를 했을 것 같은 남자분도 있었다. 야리야리한 원피스를 입고 음대 여대생 같은 미소를 짓는 40대 여성도 있었다. 평일 오전 피아노 수업에는 그 시간이 여유로운 성인들만 있었다. 생김새, 나이, 수준도 제각 기였다.35살에 처음 피아노 학원에 수강생으로 들어간 뻘쭘함이 덕분에 사라졌다.
나는 생초보자답게 어린이 바이엘 1권으로 시작했다. 일주일에 세 번 피아노 수업이 있는 날은 거의 한 시간 반씩 연습을 했다. 그리고 단 두 달만에 바이엘 단계를 끝냈다. 전 회사 동료와 통화하다가 소식을 전하니 자기 딸은 2년 동안 바이엘을 하고 있다고 나더러 대단하다 추켜세워줬다. 회사를 그만두고 뭔가 발전적인 것을 하는 것 같아 스스로 뿌듯하기도 했다. 이제 체르니 치는 여자가 되는 것이다.
바이엘이 끝나면 당연히 체르니를 들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피아노 선생님이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지셨다.
"바이엘 끝나면 어떤 거 치고 싶으세요? 가요나 동요 아니면 클래식..."
"음.. 체르니요."
적당한 체르니 100 교재를 추천해주셨다.
굉장히 뿌듯해져서는 가족들에게 체르니에 들어간다고 자랑을 해댔다.또 열심히 연습하고 체르니 교재 첫 수업을 시작했다.그런데끝날 무렵 선생님이 다시 물어보신다
보통 성인 분들은 어떤 목적을 갖고 오시더라고요. 체르니 하시면서 다른 거 하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애들이 있으면 동요를 하기도 하시고, 재즈곡을 연주하고 싶은 분들도 있고, 좀 있어 보이게 소나티네 같은 짜라라라~~ 클래식을 치시는 분도 있고요."
"음.... 체르니로 계속 연습하면서 자연스럽게 치는 걸 배우고 싶고요.(완전 모범적으로 대답하고) 애들이 있으니까 동요하면 좋을 것 같아요.(갑자기 목적을 만들어냄)
친절한 선생님은 또 적당한 동요 교재를 빌려주셨다.
집에 와서 연습을 했다. 그리고 깨달음이 왔다. 동요를 연주하는 것이 재미가 없다. 동요를 잘 치고 싶은 욕구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아이들에게 연주해 주면서 같이 동요를 부르는 엘레강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했지만,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그 시간이 좋았던 이유는 처음에는 과거에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풀이였다. 그러다 어느샌가 피아노로 연주하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심신의 안정을 준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피아노를 배우는 나의 Why를 바꿨다. 내 마음의 안정과 힐링을 위해서다. 그래서 동요 말고 소곡집 교재로 바꾸었다. 연습시간이 더즐거워졌다. 피아노 치는 여자가 아니라 피아노 소리로 힐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과거에 발목 잡힌 목적은 현재는 의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가 즐거운 목적은 미래에까지도 의미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