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eb 18. 2022
엄마의 열심과 아이의 자존감
개학전 돌아봐야 할 것
코로나 시국에 학습격차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한 학부모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장기간 원격수업이 이루어지고 간신히 전면 등교를 하게 된 시점에 열린 학부모 총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장 큰 화두는 학습격차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 요구였습니다. 교사마다 역량 차이가 나며 학습관리가 체계적이지 않았고, 아이들의 유튜브 시청률이나 게임 참여율이 높아졌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그때 학부모들의 걱정과 불안이 표출된 성토를 가만히 듣고 있던 교사 중 한 분이 말을 꺼냅니다.
학습격차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뭔지 아세요?
가정에서 어떻게 하셨길래
아이들의 자존감이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졌는지
저는 그게 더 걱정스럽습니다."
공부 정서와 자존감을
누가 망치는가
이 이야기를 전해 듣는 저도 순간 모든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가정학습 시간이 늘어나면서 괜한 불안감과 걱정에 아이를 닦달했던 시간이 떠올랐죠. 교육부 사상 초유의 5월 입학을 한 첫째를 붙들고 어설픈 엄마표 학습을 시작했습니다. 시간별 하루 계획표를 짜고 엄마가 학습을 도와주겠다 선언했죠.
엄마가 마음대로 구매한 문제집을 들이밀며,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는 척 하루에 몇 페이지씩 할 거냐고 네가 정하라는 선택권을 줬어요. 수준에도 안 맞는 사고력 수학 문제집을 몇 장 풀리다 '너한텐 어렵겠다.' 하고 포기하는 법을 보여주고, 기적적인 연산 능력을 위해 초시계 재면서 압박의 힘을 알려줬죠. 아이가 관심 있어했던 한자는 괜히 급수 문제집을 들이밀어 진도를 빼면서 어떻게 하면 흥미를 떨어뜨릴 수 있는지 실험했고, 영어책 읽기까지 억지로 시키고 나면 드디어 하루 학습 진도표에 얄궂은 칭찬스티커를 붙여 '수고했어.' 한 마디로 일갈했었죠.
밤이면 아이를 재우고 나서 상위 1%들만 모여있는 것 같은 온라인 카페에 들어갑니다. 다른 또래 아이들의 학습량을 보며, 한참 멀었는데 얘는 왜 안 따라주나 싶어 한탄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딱 한 달 하고 나니 아이의 공부 정서가 망가졌습니다. 임작가의 책 <완전학습 바이블>에서 아이의 공부 정서를 위해서는 부모가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일침이 가슴에 날아와 콕 박혔습니다.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는 아이의 표정과 작아지는 목소리를 보니 자존감 또한 상처를 받은 것이 확실합니다. 워킹맘일 때보다 더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진 그때, 엄마 정서도 어두워졌습니다.
공부 정서보다
엄마 정서 회복이 먼저
공부 정서보다 엄마 정서를 회복하는 것이 더 시급함을 깨달은 건 지금 생각해도 참 다행입니다. 태어나고 자라는 7년 동안 엄마는 평일 저녁과 주말에만 함께 했던 사람인데,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너와 함께 하겠다' 해 놓고 안 하던 문제집 들이밀며 들들 볶는 엄마를 어떤 아이가 좋아하겠어요. 엄마랑 더 많은 시간 놀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만큼 실망감은 더 커져 배신감마저 들었을 테지요. 엄마 정서를 긍정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착한 엄마가 되어 보기로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 '다 괜찮아 엄마'가 되어 보기로 했습니다. 하루 온종일 붙어 있는데 어떻게 매 시간 웃어요. 내가 가장 아이에게 관대하고 웃어줄 수 있는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 봤어요. 이것은 엄마의 관심사와 연결됩니다. 다양한 기업에서 참여적 교수법, 퍼실리테이션 등을 강의했던 저는 참여자(교육생)의 잠재력을 믿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학습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법들을 공부하고 공유했습니다. 밖에선 민주주의, 집에선 권위주의 저의 이중성을 여실히 깨달았습니다.
퍼실리테이터(촉진자)로서 아이를 대하는 시간을 일주일에 한 시간 정했습니다. 생각 수업이라고 명명한 이 시간은 <무조건적인 수용과 인정>을 하기로 마음먹고 합니다. 그 시간만큼은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든 전적으로 수용하는 거죠. 아이의 의견을 받아주고 표현하도록 하고 인정해 주는 시간을 가지는 겁니다.
엄마의 시선이 아닌 퍼실리테이터의 시선으로 마음먹고 들으니, 아이들의 대답이 어찌나 기발하고 신통방통한지요. 특히 그 무렵에는 8살, 6살 두 딸과 함께 7살 남자 조카까지 함께 케어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거실 바닥에 가만히 있는 물병을 왜 훌쩍 뛰어넘는지 아들의 행동이 도대체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주제를 던져주고 생각도구를 제시하고 마음껏 생각하고 표현하는 시간을 가졌더니 아이가 다르게 보입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의 섬세한 감정과 나름대로의 문제해결력과 즐거운 의사소통능력을 보게 됩니다. 아이가 스티브 잡스처럼 보이고 내가 함부로 대하면 안 될 존재로 보입니다. 미래에 인공지능과 비교할 수 없는 창의적인 인재가 될 것 같은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가 예뻐 보여요. 엄마는 한 시간 전보다 조금 더 착해져 있고요.
그럼 이 한 시간만 착한 엄마가 유효하냐? 생각 수업을 하는 동안 전지 한 장을 꽉 채울 정도로 기록을 하는데 그 결과물을 거실 벽면에 떡 붙여놓습니다. 그리고 오며 가며 보고 생각날 때 또 대화를 나눕니다. 아빠가 퇴근하고 오면 아이들이 아빠에게 브리핑을 합니다. 아빠의 칭찬이 쏟아지고 아이들은 어깨가 쑥 올라갑니다. 그 모습이 또 귀엽습니다.
이후로도 며칠 동안은 효과가 유효합니다. 다양하게 생각하고 표현하는 아이가 기특해, 문제집 좀 안 풀어도 뭔가 알아서 할 것 같은 믿음이 자랐습니다. 내 불안함이 줄어들자 엄마는 조금 더 착해집니다. 엄마의 열심은 감사한 일이지만 열심의 방향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엄마 정서가
모든 일의 시작이다
아이들과 일주일 한 시간씩 생각 수업을 함께 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였어요. 첫째가 온라인 수업 과제 중 "ooo가 최고야!"라는 책을 만드는데, 바로 "엄마가 최고야!"였습니다.
엄마가 최고인 이유
1. 날 응원해줘서
2. 날 사랑해줘서
3. 나랑 놀아줘서
4. 나의 의견을 들어줘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