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사 : 커리어우먼 쉽지 않네
순례길을 떠나고 싶었던 이유는 종교적인 믿음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막연히 그 길을 걸어보고 싶었고, 혼자 떠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오래전부터 나의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권고사직, 그리고 다가오는 결혼. ‘지금이 아니면 혼자 떠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퇴사 후, 순례길을 계획하게 되었다.
사실 큰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다. ‘이 결혼이 맞는 걸까, 나는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할까’ 에 대한 고민을 정리하고, 버킷리스트를 이룰 적기라고 생각해 길 위에 올랐다.
40일간의 혼자 해외 여행, 33일간의 걷기. 그 길 위에서 나는 어떤 정답을 찾았을까?
혼자 국내 여행을 짧게 가본적이 있지만 해외 여행은 처음이라 긴장이 됬다. 출국 전 우황청심환을 마시고 공항으로 향했다. 두려움이 있어도 도전하며 살아왔기에 이번에도 용기를 냈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고 불안했다. 등꼴이 오싹할 정도로 당황한 순간도 있었고, 무섭고 낯선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여정을 지속하며 두려움은 사라졌다.
중반엔 감기에 걸려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고, 4월인데 눈이 왔다. 눈보라 속에서도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악물고 정신력으로 걸어왔지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울기도 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에 왔을까 생각하며 울고, 씻고, 저녁을 먹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걸었다.
후반부에는 몸이 적응해서 자동으로 다리가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걷고 있었다. 길의 끝에서야, 내가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여정이 끝나가는 하루 하루가 너무 아쉽고 같이 걸었던 인연들이 너무 소중했다.
사실 순례길을 다녀온다고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얻은 깨달음은 분명했다.
-인생은 생각보다 괜찮다.
두려움이 있어도 일단 한 발자국 내딛어보면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 혼자 해외를 여행하는 것도, 낯선 혼성 도미토리에서 자는 것도 초반에 걱정했지만 결국 익숙해졌다. 나중에는 남자 외국인이 있건말건 바지를 갈아입는 경지에 이르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 걱정은 대부분 해결된다.
숙소가 없을까 봐, 날씨가 망칠까 봐 걱정했지만 막상 닥치면 대부분의 일은 어떻게든 풀렸다. 4월에 떠난 순례길인데 고산지대에 눈이 왔다. 다음 날이 걱정됬는데, 결국 차도로 잘 걸어갔다. 오히려 산길보다 차도이기에 더 수월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차와 공생하며 걸어가는 이 경험은 잊지 못할 것이다.
-외형보다 본질이 중요하다.
보여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한국에서는 늘 겉모습에 신경 썼지만, 이곳에서는 컨디션과 마음이 우선이었다. ‘사회가 정해준 기준’이 아니라 ‘진짜 나’를 중심으로 사는 법을 배웠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된다.
나는 늘 T형 인간이라 생각했지만, 순례길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 속에서 놀랍게도 F로 변했다. 나는 힘들 때 나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 괜찮아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너무 힘들 땐 울고 씻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면 괜찮아졌다.
-고민할 시간을 가지는 것 자체가 선물이다.
모든 답을 찾진 못했지만, 적어도 하나는 해결됐다. 그리고 그 과정이 나를 단단하게 했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 달렸다.
떠나기 전엔 한국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돌아온 후엔 생각이 달라졌다. 어느 나라든 장점과 단점이 있고,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였다.
순례길은 나에게 알려줬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결국 다 괜찮다는 걸. 문제가 생겨도 방법이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800km 걷기위해 그 숫자만 목표로 하고 걸었다면, 완주를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걷다 보니, 어느새 800km가 쌓였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매일 조금씩 걸어가면, 언젠가는 도착해 있을 것이다.
난 이것들을 깨달은 것 만으로도 이 여정은 내 인생에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신없이 사회가 만들어둔 틀에 비교와 경쟁당하며 사회가 당연시하는 것들이 내가 원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살다보면, 진짜 중요한 본질을 잊고 살게된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결핍 시키는지를 돌아볼 시간도 없는 텅빈 ‘나’로 살아간다.
이럴 때 나를 알기 위해 잠깐 멈춘다고 인생이 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잠깐의 멈춤이 삶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기회가 된다.
퇴사 후의 공백기, 그 불안한 시간들이 언제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나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유의미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정신없이 살아가며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당장 여행을 떠날 수 없다면, 단 하루라도 휴대폰을 끄고 세상과 단절해보자.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고, 정리가 안 된다면… GPT를 사용해서 ‘나와 내 인생 그리고 내 마음’에 대해 대화해도 좋다.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쌓이자,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하던 습관적 소비, 관계, 배달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결핍을 직면하고, 무엇이 진짜 나에게 중요하고,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이 모든 시작은 순례길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나를 치유하는 여정’을 걷고 있다.
이 길 위의 나는, 꽤 괜찮다. 지금 이런 내 삶이 너무 재밌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