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종착역, 유튜브 콘텐츠

by 고영이

그래서 마침내 이곳에 왔다.

옷가게와 어린이박물관, 스타트업을 거쳐 마지막 종착역인 유튜브 콘텐츠 회사로.

절대적으로 보면 큰 회사는 아니지만 내가 거쳤던 회사 중에는 가장 규모가 컸다.


스타트업의 폐해를 단단히 겪고 나와서 또 작은 회사라니. 논리적이지 않은 행보지만 여전히 작은 회사가 좋았다. 복지와 성과급도 같이 작아진다 해도, 체계가 물렁하다고 해도, 그럼에도 작은 게 좋았다. 작다는 건 아늑하다는 거고, 아늑하다는 건 마음에 긴장감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나는 분위기가 좋으면 끝까지 가는 인프피니까. 이젠 정말 오래 다닐 직장이 필요했다.


제한된 정보로 회사의 분위기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그 정보가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선택적으로 골라낸 것이었을 때는 더욱이 그렇다. 사람인에 ‘유튜브’를 쳤을 때 나오는 모든 공고에 별표를 쳐가며 추리고 추렸다. 스크롤 한 번에 뒷목이 쎄한 회사는 단박에 거르고 나머지는 회사 홈페이지와 채널을 들락거리며 미사여구의 진위를 검증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두 가지 후보군을 뽑았다.


첫 번째는 제목 제일 앞에 월 270을 강조해 써넣은 곳이었고,

[월 270 / 영화 소개 콘텐츠 작가 채용]


두 번째는 사내 분위기와 복지를 강조한 곳이었다.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할 작가를 모집합니다. (야근 X, 식대/간식 제공)]


전자는 매일매일 명확한 업무 리스트를 바탕으로 두다다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수정예의 프로들이 연상되는 곳이었다. 월 270만 원을 보장해 줄 테니 너는 맡은 바 임무를 알아서 완벽하게 해내거라.

반면에 후자는 좀 더 아기자기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떠올랐다. 삼삼오오 모여서 커피를 마시고 궁금한 게 있으면 서로 물어보고 뭔가 웃을 일이 잦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전자의 장점은 생각보다 높은 연봉과 영화와 관련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고, (영화광인 나는 그 당시 영화 소개 채널에 빠져있었다.) 후자의 장점은 '생일 축하' 제도나 '간식 무한 제공' 같은 MZ 스러운 특징이었다.

그리고 나는 후자에 조금 더 마음이 쏠렸다. (대기업은 못 갈 팔자구나.)

영화 소개 콘텐츠 정도는 입사해서 내가 하나 만들면 되지 않겠어?ㅡ그러나 입사 후에 영상물 저작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좌절하게 된다ㅡ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렇게 이 회사를 선택했고, 이 회사도 나를 선택해준 덕분에 나의 첫 유튜브 작가 경력이 시작되었다.

진짜 야근이 없는 게 맞는지, 간식 무한 제공은 잘 지켜지고 있는지, 그래서 내 생일파티는 만족스러웠는지, MZ 스러운 회사는 정말 좋기만 한지 등등... MZ 스러운 솔직함으로 차근차근 풀어놓을 예정이지만 살짝 스포를 하자면 첫인상은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회사에 대한 인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가끔 내가 전자를 선택했다면 내 회사 생활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지 궁금할 때가 있다. 내가 너무 좋아해서 소개해주고 싶은 영화 리스트를 신나게 뽑고 편집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월 270만 원을 받으며 밥도, 옷도, 적금도 지금보다 고급스러워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전자는 떠올릴수록 아찔한 선택지다. 월 270보다, 영화 소개 채널 운영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반짝이는 것들을 많이 주웠으니까. (그리고 전자가 나를 선택해줬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직관적이었을지언정, 마지막 선택의 순간에 후자로 마음이 기울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나는 지금 회사를 절대적으로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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