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꼬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나의 선생님

by gozal

내가 처음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게 된 것은 약 20년 전이다. 20년 전 이맘때 나의 고등학교 은사님이 돌아가셨다. 그냥 나를 가르치신 선생님이라 은사님이 아니고 나에게는 정말 생명의 은혜와 같은 분이셨다. 나는 아직도 그날 이후 나의 모든 비밀번호 분실 답변을 은사님의 존함으로 하고 있다. 물론 질문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의 이름은?’ 이다. 보통 사람들은 비밀번호를 찾기 위한 질문을 불변하는 것들로 정한다. 그 계정이나 사이트나 비밀번호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고 찾기 위한 질문의 답은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제목을 야마꼬 선생님으로 한 것에 대해 짧게 이야기 하자면 선생님은 남자분이시지만 키가 아주 작으셔서 160이 채 되지 않으셨다. 그 마르고 작은 몸으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와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호랑이 선생님이셨다. 하지만 작고 마른 몸때문에 '꼬마야'를 거꾸로 읽는 '야마꼬'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셨다.


나에게 그분은 그런 존재였다. 내 고집에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엘리트 선수의 길을 가겠다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그 길을 내 손으로 끊어내기까지 상당한 고통을 겪었다. 헤질 대로 헤어진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학교에 전학했을 때 나를 품어주신 분은 단 한 분이었다. 나는 그때 17살에 세상이 모질고 박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선수로서 보호받던 생활에서 벗어난 나는 벌거벗겨진 상태였다. 전학을 간 학교는 나름 이름있는 명문 사립 여고였는데 운동선수 출신 전학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적응할 수 있겠는가? 없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도록 하라."던지, "대학은 가지 않아도 되니 사고만 치지 말라"느니, "지금의 성적으로는 받아줄 담임교사가 없을 거라"는 둥, 이미 학교에서 유명한 "밴드부에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대학을 가보는건 어떻겠냐."는 수많은 질문을 받아야 했다. 나는 그 학교에 처음 발을 딛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날 처음 안 사실이지만 운동선수로 살았던 단 6개월만에 나의 성적표에는 수우미양가 중 '양'도 별로 없는 ‘가’ 뿐이었다. 중학교 시절 방과후 운동부로 활동하면서 그래도 90점에 가까운 성적을 유지했지만 공부란 것이 다 그렇듯이 잘하는 사람이 있는게 아니고 그냥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물론 나는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목표가 달랐고 공부보다 중한 것이 있었다. 단지 목표가 다른 6개월의 성적일 뿐이었다. 어쨌든 그 때 혜성같이 어디선가 나타나 나를 흔쾌히 받아준다는 담임이 나타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도 탐탁치 않았으나 학년부장을 맡고 있었기에 억지로라도 받아주신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분은 그 이후로 3년간 나의 담임이 되어주셨다.


한 반에 50~60명, 10반까지 있는 거대 고등학교에서 문과 불어반 2개 중 한 반에 속해있던 나는 3년 내내 같은 선생님 반 학생이면서 다른 학생들은 선생님은 너를 데리고 올라가실거라고 매번 확신했다. 사실 나는 그것이 명절때마다 엄마가 보내신 사과박스(진짜 사과가 들은) 때문이었는지 진짜 나를 아끼시는 마음이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은 여쭐 수 도 없다. 선생님은 일반적인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거두어 주셨다. 한번은 전학을 가자마자 새로산 가방과 그 안에 들었던 지갑, 십만원이 넘던 돈, 새 필통과 친구들에게 선물받은 펜들...이 모든 것을 수학여행 교육차 체육관에 모여있던 사이에 누군가가 훔쳐가 버렸다. 나는 그길로 그것을 핑계로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집에는 "이 상태, 이런 대우, 이런 상황에서 학교를 다닐 수 없고 나는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버텼다. 선생님은 매 쉬는시간 전화를 걸어서 "나오게 해주세요." 이말만 하고 끊으셨다. 나는 일주일을 버티다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되었다. 전학을 가게된 학교는 소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이런 영화에 나올법한 학교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6개월까지 교복한번 입어본적 없는 나는 무릎밑 십센티 치마, 귀밑 3센티 머리, 굽 3센티 이하 구두, 흰양말, 돌아가면서 하는 주번, 청소 당번까지도 익숙지 않았다.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야간 자율학습 또한 그랬다.


전학을 가서 제일 마지막 관문은 교장선생님이었는데 밴드부에 들어가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시는 교장선생님께 90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아직도 그때 엄마의 모습이 충격으로 남아있다. 나는 그저 나의 꿈을 위해 모진 고생과 노력을 했을 뿐인데. 그러다가 그 꿈을 내 손으로 포기하고 밑바닥이 보이는 벼랑 끝에 서있는 위태로운 사람일 뿐인데 그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내 기준에는 그랬다. 나는 항상 자신감이 있었고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엄마는 교장선생님께 "우리 아이는 체육학과를 갈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날 이후로 전교에서 나는 유일하게 야간 자율학습을 면제받은 학생이 되었다. 담임 선생님 댁과 우리집은 지척에 있었기에 가끔 선생님과 함께 집에 돌아가는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호랑이 같던 선생님은 “힘들지? 조금만 참으면 좋은 날이 올 거야”라고, 따스하게 말씀해 주셨다. 성격 급하고 불같고 욕쟁이 선생님의 진심을 알기에 학생들은 너나없이 선생님의 그 찰진 욕을 듣기 위해 노력했다. 이년 저년 해도 정겹고 다시 듣고만 싶었다. 체육대회가 있던 날에는 항상 선생님은 나를 불러 교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게 하셨다. 얼마 전까지 선수 출신이었던 나는 다른 학생들과 같을 수 없었다. 1등이 꼴등을 따라잡으면 꼴등은 그만 뛰어야 한다는 규칙은 더 이상 상을 줄 사람이 없어져 급기야는 마지막 결승선은 걸어서 들어오라는 주문을 받아야 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반 깃발을 쥐여주시고는 이걸 들고 운동장을 한바퀴 뛰면서 세레모니를 하라고 하셨다. 너무도 환한 얼굴로 웃어주셨다. 3학년 체육대회 마라톤 대회 시상식에서 교장선생님이 “자네는 체대를 가야겠네”하고 말씀하셨다. 교장선생님은 몇 년 전 머리를 조아리던 전학생을 기억하지 못하신다.


선생님 덕분에 방황과 갈등의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유혹하는 모든 것들을 차단했다. 아니 그렇다고 정말 모범적으로 산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2년 만에 모의고사 성적이 100점이 넘게 올랐다. 다른 반에서 인터뷰하겠다고 난리였다. 야간 자율학습에 참석할 때는 어떻게 공부하나 보자며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나는 재수 없이 그 긴 터널을 지나 서울에 있는 어느 정도 원하는 대학 체육교육과에 합격했다. 졸업식 후 학교에서 후배와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며 초청을 받았다. 아마도 서울의 이름있는(?)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과 후배들과의 질의 시간인 것 같았다. 나는 약 다섯 명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그날 어느 질문과 어느 답을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꿈을 향하고, 좌절하고, 손가락질받고, 다시 일어서고, 또 그런 나의 서사들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 속 구름 위에 있는 느낌이었다.


나의 대학 생활은 무지개가 떴다. 나는 성인이 되면 바로 무지개가 뜨는 줄 알았다. 그리고 대학의 밖에서는 그게 맞았다. 공부는 뒷전이고 흥청망청했다. 뒤로했던 친구들도 다시 돌아오고 모르던 사람들까지도 주변에 북적거렸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교생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계속 마음이 불편하고 무언가 나사가 빠진 것 같았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 다시 나의 길을 방황하는 모습을 선생님께 보여드리기 싫었다. 항상 학생들이 졸업하면서 하는 말 있지 않나. “선생님 성공해서 찾아뵐게요” 나는 이 말을 가장 싫어한다. 성공이 무엇인가.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 생각했다. 잘 살지 못하고 있다 여겼다. 그래서 집 앞에 있는 학교도 한번 찾아가지 못했다. 어느 봄날에 버스 안에서 우연히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얼굴이 반쪽이 되시고 수척해 보이셨지만 나는 인사치레로 "선생님 얼굴이 좋아 보이신다"고 했다. 선생님은 "얼굴이 좋아 보이기는 요즘 힘들다"고 하셨다. 나는 "다음 달에 교생실습을 나가니 곧 찾아뵙겠다"고 했다. 드디어 그날이 온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시 당당하게 선생님께 설 수 있다고 믿었다. 선생님은 오래된 제자에게 이야기 하시듯 "교사는 되지 말라"고 하셨다. 대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라"고 하셨다. 내가 먼저 내리고 선생님이 앉아계신 떠나는 버스를 한참 바라봤다. 무언가 아쉽고 먹먹했다.


선생님은 이틀 뒤 돌아가셨다. 단도직입적으로 선생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그날 힘들다고 하신 말씀 안에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었을까. 오죽했으면 오랜만에 만난 나같은 제자에게 푸념을 하셨을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장에 가서 울고 또 울고 선생님들께 이틀 전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니 “ 죽기 전 만날 사람은 다 만난다더니 그러는가 보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나만 몰랐던 걸까..'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아쉬워 다시 한번 영정사진을 보러 들어갔다. 멍하니 사진을 보고 신발을 구겨 신던 중 바로 옆에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의도치 않게 선생님의 얼굴을 보았다. 몇 초도 되지 않아 가족들이 울면서 뛰어 들어갔다. 나는 그것이 입관식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직도 창백한 선생님 얼굴이 떠오른다. 왜 그 순간이었을까. 나는 한 달 뒤 정말로 모교의 교생실습을 나갔다. 5월 중 스승의 날이 되어 다들 그리웠던 담임선생님들께 꽃 한 송이 달아드렸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3년 내내 담임이 되어주신 선생님이 안 계셨다. 공립도 아니고 사립인데…. 정년까지 기다려 주셨어야 하는데 말이다. 나는 그 이후로 과장되지 않게 단 하루도 선생님을 잊은 적이 없다. 지금 학교에 있어서 그런지 매 순간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이런 마음이었을까? 선생님은 이런 생각이었을까? 나는 그분을 닮아갈 수 있을까?' 오늘도 내일도 이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가 학교를 떠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믿는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은사님의 뜻을 같이 실천하라고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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