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 보고싶은 나의 가족
띵가 할아버지는 멋쟁이였다. 팔뚝에 새 모양의 문신이 있었던 걸로 봐서 젊은시절 한따까리 하신 것 같고 얼굴도 아주 미남형이었다. 게다가 당시 동네 배드민턴 클럽 회장까지 하셔서 동네에서는 인기 최고가 아니었을까 싶다. 가끔 할아버지를 따라 국사봉 약수터 배드민턴장에 갔던 것 같다. 실내 배드민턴장이 많이 없던 그때는 그 약수터 배드민턴장이 동호회 클럽 모임 장소였다. 우리 집안을 통틀어 체육을 전공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아마도 아빠와 띵가 할아버지가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물론 어릴 적에는 알 수 없었으니 배울 생각도 없었다. 아무튼 키 크고 잘생기고 배드민턴 클럽 회장까지 하신 할아버지는 언니와 나를 데리고 영화관에도 자주 가주셨다. 우뢰맨, 후레시맨 이런 영화들은 다 할아버지와 본 것 같다. 멋쟁이 할아버지는 띵가 할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게 할아버지는 너무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할머니는 아들딸을 일곱이나 낳은 조선시대 아낙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로 극단에 있는 두 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싸우다가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이혼하느니 마느니 하셨다.
띵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집 가까운 곳에 사셨다. 늘 가까운 곳에 있어 가족 같기도 하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시간이 지나 여러 가지 일들을 겪고, 그 여러 가지 일들은 다른 장에서 아마 자주 이야기할 거다. 내가 교사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때 우리집은 경기도 이천으로 이사를 했다. 경기도로 시험을 봤지만, 학원 때문에 서울에서 공부해야 했던 나는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까지 약 석 달간 띵가 할머니 집에 신세를 져야 했다. 할머니 집에는 엄마도 함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나보다는 띵가 할아버지가 그 무렵 대장암 말기로 투병 중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너무도 건강했던 할아버지는 화려한 젊은 시절의 혹독한 대가로 심근경색, 대장암을 얻으셨고 병마와 싸우던 사람이 없던지라 아마도 그것은 담배와 커피를 많이 하신 탓인 듯하다. 물론 추측이다. 그 집에 있던 석 달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봉지봉지 수많은 약을 드시면서 하루하루 버티셨고 내가 있던 그때는 식탁에 앉아 식사도 하시고 거실에서 돌아다니기도 하셨다. 할아버지는 하루하루가 다르셨다. 석 달의 그 짧은 시간에도 식탁에 나오지 못하는 횟수가 늘었고 침대에 누워 고통스러워 하시는 날들이 늘어갔다.
어느날은 삼촌들이 와서 함께 기도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뒤돌아 누워계셨다. 나는 그날 처음 알았던 것이…. 대장암 말기이고 그토록 고통스러워 하시던 할아버지는 그 순간까지 본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셨다고 한다. 살고자 하는 마음과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생각할 수 없었다. 1차, 2차 합격발표가 나고 3차, 4차까지 가는 동안 정말 죽을 것 같았고 지옥을 맛보았다. 마지막 관문인 수업 실연과 면접을 앞두고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배드민턴에 대해 여쭤봤다. 아…. 우리 할아버지가 국사봉 배드민턴 클럽의 회장이셨지, 클럽 회원들을 키워주시고 존경받던 명예 회원이었지. 그때야 나는 알았다. 암과의 사투로 빛을 잃어가던 할아버지는 그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셨는지 배드민턴 라켓을 휘두르시며
"이것이 하이클리어, 이것이 헤어핀이다!" 라고 시범까지 보여주셨다. 할아버지의 눈은 어느 때보다 빛났고 그 옛날 멋쟁이 할아버지가 겹쳤다. '아!!! 내가 어렸구나. 몰랐구나. 죄스럽다.' 그때 처음 할아버지에게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 합격자 발표가 나고 할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손뼉을 치셨다.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해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나는 그 집을 떠나 이천으로 갔고 대기발령이던 일 년간 할아버지는 점차 또 잊혀 갔다. 가끔 할머니 집을 찾을 때면 가는 내게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자주 안 오냐, 자주 좀 들르라"고 하셨다.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음으로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이었다. 일곱 형제를 두신 할아버지는 외롭지 않게 가족들이 족히 30명은 되어 장례식장은 북적거렸고 가시는 길에 이 많은 사람을 보신다면 사교적이던 멋쟁이 할아버지는 얼마나 호탕하게 웃으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만났다. 내가 만났던 암과 사투를 하시던 그때와는 또 다른 너무도 마르고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나는 오열했다. 죄책감이란 것은 이런 것인가 보다. 했다. 베레모를 즐겨쓰시고 손수 배드민턴 라켓 줄을 매시던 할아버지, 영화를 좋아하고 커피를 좋아하던 할아버지. 우리 다음에 다시 만나 같이 우뢰매 보러가요. 그때는 할아버지와 배드민턴도 한 게임 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