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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Mar 17. 2023

스즈메의 문단속 단상

기흥. CGV. 스즈메의 문단속.

분명 말할 수 있는 것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일본의 위치성에 의한 필연적인 자연적 재앙과 그에 대한 추모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아마 이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리라는 것이다. 재앙과 이에 대한 추모를 사유함에 있어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어떻게든 중립성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감독의 고민은 그가 나고 자란 일본의 역사, 특히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로 얼룩진 일본의 근대사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다만 이러한 고민이 과연 온전한 결실을 맺을지 아니면 일그러진 결실을 맺을지는 모르겠다.

이런 걱정은 뒤로 하고 굳이 따지면 이번 작이 전작 <날씨의 아이>보다 어떤 점에서는 더 나아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날씨의 아이>는 엄청난 재앙과 맞서는 가운데 해결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굉장히 낭만적으로 해결해 문제가 되었다. 전작에 비하면 본작은 낭만성을 많이 덜어낸다. 여기에는 21세기 재패니메이션을 선두하고 여전히 근본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향력이 많이 남아있다. 서사, 인물, 설정 등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원령공주>의 이미지가 남아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를 융합한 큰 틀에 하야오 감독이 남긴 유산을 활용해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이려고 한다. 이러한 활용이 <스즈메의 문단속>의 설득력을 높이는 것에 주효하게 작용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큰 틀로 준비한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의 융합이 너무 얼기설기 되어 있고 하야오 감독의 유산은 사이의 간격을 온전히 봉합하지 못했다. 지진이라는 자연 재해는 인재가 아니기에 목적도 의지도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그저 어떻게든 피해가주십사, 닥쳐오면 금방 가주십사 하며 엎드려 빌 수밖에 없다. 일본의 위치가 한 번 쯤은 들어봤을 환태평양 조산대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들에게 재해는 너무 당연지사라 너무 심하지 않기만을 그래서 내일을 살 수 있길 바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인식을 일본인을 제외한 타국가의 관객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세심하게 서사를 짤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스스로가 타고난 모순점, 즉 전범국 이후의 세대라는 측면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이후 영화에 관객이 공감하는 정도가 결정되지 않을까 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재앙 혹은 재해-소수의 희생-추모라는 틀을 사유하고자 한다면 그에게 전범국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사유를 내로남불로 만들 것이다. 일본의 감독이 일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발산을 내부로만 응집시킨다면 일본을 제외한 외부의 관객들은 감독에 대한 신뢰성과 신빙성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부디 내부로만 응집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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