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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Apr 04. 2023

라스트 필름 쇼 단상

용산. CGV.  라스트 필름 쇼.

왜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요즘 해외 영화계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소재인가 보다. 2월에는 데미언 셔젤 감독의 <바빌론>, 3월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스트 필름 쇼>가 나오더니 이번 4월에는 판 나린 감독의 <라스트 필름 쇼>가 나온다. 잠시 다른 소리하자면 한국에서는 과연 이 소재로 누가 영화를 만들 수나 있을지. 한국 영화산업을 고려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각설하고 소재와 콘텐츠가 빠르게 휘발되는 시대에 후발 주자는 언제나 불리한 위치에 있다. 이미 앞서서 비슷한 콘텐츠가 지나갔는데 바로 뒤이어 나오는 후발 주자에게 왜 나왔느냐는 물음이 나오는 것은 안타깝지만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앞선 두 영화와 똑같은가? 놀랍게도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앞선 두 영화보다 더 가치 있다. 인도인인 판 나린 감독 본인의 자전적 영화. 인도라는 위치성, 역사성, 정체성은 <바빌론>과 <파벨만스>보다 더 혁명적인 의미를 역동시키에 이 영화는 후발 주자임에도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바빌론>과 <파벨만스>의 사이에서 한 번 더 경계를 흔든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후발 주자임에도'가 아니라 새로운 영화로서 스스로 우뚝 선 영화이다.

크게 보면 이 영화는 <바빌론>만큼이나 거칠지만 <파벨만스>만큼이나 따뜻하다. 두 영화의 톤을 함께 가지고 가는 와중에 영화는 영화를 사랑하게 되는 시간, 즉 꼬마 사메이를 기차, 빛, 이야기라는 알레고리로 엮으며 자신있게 나아간다. 영화에서 사메이를 제외한 인물들이 모두 어딘가에 종속된, 즉 정지한 인물들이란 것을 느끼고 보면 <라스트 필름 쇼>의 제목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종말적인지 알 수 있다. 특히 몰락한 브라만 계급으로 간이역이나 다름 없는 작은 기차역에서 차를 파는 사메이의 아버지. 혹은 갤럭시 영화관의 작은 영사실을 벗어나지 않는 파잘. 앞서 제시한 알레고리를 유념하며 두 사람과 사메이를 비교하면 이 영화가 얼마나 영화를 아름답게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바빌론>과 <파벨만스>보다 더 혁명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마지막 장면에 있다. 시간과 빛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정지된 것들은 뒤처지고 그것들은 뒤처졌다는 이유로 파괴되고 분해된다. 디지털 영사기에 밀린 35mm 필름 영사기는 분해되어 숟가락이 되고, 35mm 필름은 녹아 팔찌의 색이 된다. 과거의 영화들은 모두 진토가 되어 짓밟히고 먼지가 되어 흩날린다.

하지만 <라스트 필름 쇼>는 진토와 먼지를 모아 화신으로 바꾼다. 35mm 필름의 색을 입은 팔찌는 무희들의 팔에 걸려 살아 숨쉰다. 인도 영화를 보며 자란 시간은 그 화신들을 마음에 담는다. 죽은 영화는 윤회하여 이야기로 회자되고 그 이야기는 빛으로 담겨 시간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화신은 뒤처진 남성 브라만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성 무희의 팔찌를 통해 어린 아이에게 전승된다.

<바빌론>과 <파벨만스>는 백인 남성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라스트 필름 쇼>는 유색 남성이 아이로 화신해 여성으로부터 전승을 받아 말한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낫다는 것이 아니다. 주류의 목소리를 넘어 인도라는 제3국의 목소리로 영화를 사랑하게 된 한 영화인의 목소리가 더 혁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목소리는 오늘날과 같이 주류, 유명세, 자본, 우경화에 더 집착하는 시대에 더 혁명적이다. 영화는 시간이다. 빛을 칸칸이 나누어 이야기로 화신해 쭈욱 밀고 나아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과거를 잊지 않고 내일을 향해 계속 나아갈 것이다. 앞이 가로막힌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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