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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Apr 09. 2023

피기 단상

홍대. KT&G 상상마당. 피기.

통쾌와 불쾌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영화이다. 제목처럼 영화는 꽉꽉 차서 짓눌리는 기분이 들게 한다. 특히 음향과 감정. 출렁이는 사라의 육체와 함께 꽉 찬 채 스크린을 넘어 오는 음향과 감정은 지나치게 높은 밀도로 관객에게 던져진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언어 폭력, 물리적 폭력, 관계에 의한 폭력 등 가능한 모든 폭력에 노출된 사라는 육중한 육체와 반대로 찌그러지고 짓눌려있다. 음향은 찌그러지고 짓눌린 사라를 대변하듯 공포와 긴장을 조성한다. 혐오의 감정, 혐오에 저항하지 못한 채 삭혀지는 감정, 분노를 실었으되 방향 없이 폭발하는 감정 등은 관객에게 제발 이 감정의 연쇄가 끝나기를 바라게 한다.

하지만 관객의 바람과 다르게 영화는 감정의 연쇄를 끊는다. 물론 관객의 바람대로 영화가 끝날 필요는 없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 나쁘지 않은 마무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관객의 바람과 다르게 끝나는 것은 관객을 이해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만족 식으로 끝나는 것으로 느껴져 더 아쉬울 따름이다.

사라가 연쇄살인마에게 느끼는 감정은 금단의 애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인마에게서 처음으로 따뜻한 애정을 느끼고 나아가 성적 욕망까지 느낀다. 애초에 영화는 상식적, 사회적, 일반적 도덕과 선을 긋고 있다. 어떤 전사도 없는 걸로 봐서 살인마는 절대적인 악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서사의 중심인 사라는 살인마에게서 유일하게 위로, 다정함, 사랑을 느낀다.

이런 본인의 감정에 사라가 고뇌하는지 모르겠다. 고뇌한다고 미루어 짐작만 할 뿐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다. 사라가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자신을 혐오한 가해자들을 구하기 위해서인지 혹은 자신을 짓누르는 현실처럼 자신에게 살인을 강요한 살인마에게 분노한 것인지 결말부에서 터지는 분노는 어떤 분노인지 모르겠다. 죽은 살인마를 보며 "안 돼!"를 부르짖는 사라가 살인마에게 죽지 말라고 부르짖는 것인지 살인한 것에 대해 절규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앞선 감정을 정리하지 않은 채 나아가다 총성, 살점과 피, 절단된 신체 등 고어한 이미지와 음향으로 혼자 끝맺는 듯하다. 사라 혼자 도덕적 선택을 하고 피칠갑을 한 채 석양을 맞으며 사라지는 이 영화의 엔딩에서 사라와 똑같이 짓눌려 있던 관객은 바닥에 내동댕이 쳐져 있다. 고어한 이미지와 음향에 통쾌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찝찝해 불쾌해 "허 참..." 하며 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기분이다. 나도 좀 데리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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