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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un 07. 2023

1986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단상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1986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그 여름의 우정이 풍기는 은은한 향기(3.5)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하게 여름의 전원과 우정의 향기가 담담하게 스며들도록 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고등어된장조림캔, 일명 사바캔을 본 히사가 타케와 우정을 쌓게 된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어느 한 때를 빛나게 해준 누군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매개체라는 점에서 사바캔은 익숙하지 않지만 익숙하다는 기이한 몰입의 매개체가 된다.

여기에 영화는 낭만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현재의 히사와는 반대되는 여름의 전원, 그것도 바다가 접한 전원을 덧붙인다. 현재의 히사는 작가를 꿈꾸나 자기 작품은 쓰지 못하는 대필작가이고 아내와는 이별해 가끔 딸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작품을 쓰고자 하는, 실날 같은 의지는 출판사 직원의 비웃음을 맞을 뿐이다. 히사의 삶은 히사의 눈밑을 검게 칠한 다크서클처럼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버겁고 잔인하게 현실적이다.

반면 과거의 히사는 조금 자신감이 없고 포기가 빠를지언정 온통 생기가 넘친다. 겨울을 버텨 봄에 싹을 틔운 생명들은 무더운 햇빛에도 불구하고 눈이 시리게 푸르다. 아이들은 방학을 맞이해 무더운 햇빛에 맞서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여름의 전원은 생기가 넘친다. 이토록 생기가 넘치는 전원에서 히사와 타케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동네 산을 넘어 왕복 12시간이나 걸리는 '부메랑 섬'으로 가서 보려는 것은 돌고래이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기에 신비롭고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를 가르는 모습은 생기가 가득하다. 과거의 히사가 사는 바다를 접한 여름의 전원 나가사키는 낭만적인 생기의 공간이다.

영화의 낭만성은 공간만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서도 구현된다. 히사의 가족은 보케와 츳코미의 만담이 가득하다. 엄마는 억척스럽게 살림을 돌보며 바가지를 긁고 아빠는 그런 바가지에 대들기도 하고 때로는 애정을 표하며 꼬리를 살랑대다가 뒷통수를 맞는다. 까불대는 동생에게 히사는 빽 소리를 질렀다가 딱콩을 맞고 부모님의 애정 행각에 웩 하다가 푸하하 웃는다. 가볍지만 서로를 향한 정이 가득한 히사의 가족은 현재와 비교해 아득한 분명함 속에 있다.

돌고래를 보러 가던 길에 만난 인연들도 영화의 낭만성을 살린다. 귤농장 할아버지는 산과 강을 누비는 타케를 이놈하며 술래잡기를 한다. 양아치들로부터 타케와 히사를 구해주는 외로운 늑대(?)는 넘어져 있는 타케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밟힌 밀집모자를 주워 말없이 건네준다. 마지막으로 아마도 재일조선인 2세가 아닐까 하는 고등학생 누나는 바다에 실려온 한국의 오성사이다 캔을 보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바다 너머에 있다 말하며 가보고 싶다 혹은 보고 싶다는 눈으로 바다 너머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늑대와 누나는 트럭으로 돌고래 모험을 온 히사와 타케를 무사히 집으로 태워준다.

하지만 영화의 낭만성을 생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바캔이어야 한다. 히사에게 사바캔이 왜 타케와 연결되는지, 즉 히사와 타케 사이에서 사바캔과 관련해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사바캔은 타케에게 있어 사별한 아빠를 떠오르게 한다. 아빠가 가끔 해주던 사바캔 스시. 진짜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입을 가득 채우고 혀에 느껴진 고등어와 밥은 곧 부정(父情)의 맛이기 때문이다. 사별한 아빠를 향한 그리움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리움을 품고 있는 타케가 스시를 좋아하는 친구 히사를 위해 사바캔 스시를 만든다는 것은 타케 본인의 치유 행위이자 극우지정(極友之情)이다. 그런 타케의 마음을 받아 스시를 맛있게 먹은 히사 역시 세상에 다시 없을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이자 타케를 향해 극우지정을 표한 것이다. 극에 달한 우정은 과거를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버겁고 잔인한 현실에 대항하는, 생기 넘치는 낭만의 추억이 되어 다시금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두 소년의 우정은 단순히 초등학생의 치기 어린 짧은 우정이라 생각하기 어렵다. 어느 세대, 어떤 시기에 맺은 우정이든 치기 어린 짧은 우정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오해가 쌓여 친구를 멀리 하던 와중에 이별의 순간 자리를 떨쳐 일어나 달려 친구를 껴앉고, 서로에게 다시 보자고 수없이 외치며, 이별의 순간 참았던 눈물을 아빠의 품에서 터뜨려 어른으로 한 걸음 디딜 수 있는 것은 감정이 쉽게 동(動)하는 치기가 어린 우정이기에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그러한 치기가 가슴에 새겨져 오늘을 살 수 있게 하는 생기의 낭만이 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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