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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un 08. 2023

말없는 소녀 단상

광화문.씨네큐브.말없는 소녀.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침묵의 손길


침묵도 대화를 위한 뜨거운 감정임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이니셰린의 밴시> 때도 그랬지만 아일랜드는 정말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 이토록 차가운 차분함이 감도는 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그 사람들의 감정은 어떤 모양을 띠고 있을까? 그들 감정의 모양이 격변하는 순간을 얼마나 많은 의미의 아름다운 파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우울할 정도의 차분한 평화 속에서 비약하는 인간의 감정은 언제 봐도 아름다울 듯하다.

<말없는 소녀>에서 코오트의 침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복닥대는 물리적 사이를 날카로운 침묵이 찌르는 여섯 가족에서의 침묵과 널찍한 물리적 사이를 다정한 침묵이 스며드는 아일린-숀 가족에서의 침묵이다. 각각의 침묵에서 코오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얼마나 공감하는지에 따라 이 영화에 대한 반응도 다를 듯하다. 하지만 침묵이 가장 다정한 대화일 수 있다는 영화의 외침은 피부의 미세한 떨림으로라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영화의 첫 시작부터 숨이 멎을 듯하다. 수풀로 가려진 코오트의 모습은 창백한 시체를 적확하게 형상화한 듯해서이다. 어떤 사연으로 이 아이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백지장의 피부를 갖게 되었을까. 시체 같은 아이가 영화 시작 후 체감상 약 10분 동안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으며 간신히 듣게 된 목소리는 너무 연약하고 떨리고 있어 들리지도 않는다. 연약함과 우울이 거침없이 밀려와 가슴의 무언가를 짓누르는 기분이다.

그렇기에 코오트의 연약함과 우울의 파도를 떨쳐버리는 것을 영화는 또 다른 침묵으로 제시한다. 명확하게 구분하듯 영화는 같은 아일랜드에 있음에도 아일린과 숀의 공간을 다른 아일랜드로 구현한다. 날카로울 정도로 침묵해 우울하기까지 한 친가족의 아일랜드와 달리 아일린과 숀의 아일랜드는 따뜻하고 다정하다. 포근하기 그지 없는 침묵 속에서 창백하던 코오트가 혈색을 찾아 아일랜드의 우울과 대비되어 비약할 때 관객도 함께 비약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친가족의 아일랜드에서는 밤사이 침대에 실수를 하던 코오트는 아일린과 숀의 아일랜드의 첫 날 밤 여지없이 실수를 한다. 그런 코오트에게 아일린은 실수가 떠오를 수 있는 어떤 단어도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트릭스가 오래되어 푹 꺼진다고, 왜 이런 매트릭스에 코오트를 재웠는지 자신의 실수라고 말한다. 새로운 곳에 와서 놀랐나 보구나, 아직 어려서 그럴 수 있단다 와 같은 말이 아니다. 실수 자체를 지워버리도록 침묵하면서 다정하게 안을 뿐이다.

사람들은 침묵할 기회를 놓쳐 오히려 많은 것을 잃는다는 숀의 말쳐럼 현대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표현한다. 심지어 이 글 조차도 단상이라는 이름을 걸고 너무 많은 말을 한다. 이제 그만 써야 할 듯하다. 침묵 속에서 서로를 이해해 공동체가, 가족이 된다는 것. 조용히 상대를 관찰하고 사유하면서 배려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따뜻한 가족을 선사하는 소통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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