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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un 08. 2023

슬픔의 삼각형 단상

광화문. 씨네큐브. 슬픔의 삼각형.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한바탕 웃음 뒤에 오는 것은 허무인가 희망인가


블랙코미디의 웃음은 마냥 웃기에는 날카로우며 그렇다고 날카로움에 집중하기에는 허무하다. 특히 체제, 사회, 세계 등을 희롱하는 블랙코미디는 공허에 가까운 허무를 이겨내야 한다. 희롱당하는 그 세계는 곧 관객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 즉, 영화든 제작자든 관객이든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영화도 자본주의 없이는 제작도, 상영도 불가능하다. 자본주의가 이미 자연화되어 있는 세계에서 인간은 완전히 자본주의에 동화되어 있지도 않지만 동시에 온전히 벗어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블랙코미디는 마음 한 켠을 불편하게 잠식한, 공허에 가까운 허무조차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장르인 듯하다.

<슬픔의 삼각형>의 제목인 슬픔의 삼각형은 우리 말로 하면 미간인 듯하다. 눈썹과 코 사이에서 때로는 맛의 진실을 때로는 감정의 진실을 드러내는 이 삼각지대는 감정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부위이다. 그렇기에 이 부위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복잡하게 단적으로 말하면 자본, 계급, 교육, 성별 등 수많은 교차 지점의 정도가 단번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슬픔의 삼각형>은 감정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기에 오히려 현 세계의 민낯을 엿볼 수 있는 이 부위로 관객에게 허무하도록 날카로운 웃음을 선사한다.

정말 많이 웃었고 그만큼 공허했다. 특히 2부의 호화 요트는 요트 그 자체가 자본주의가 자연화된 세계의 알레고리로 느껴져 씁쓸하게 웃었다. 나아가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혹은 종말을 맞이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허무를 느끼며 <데스노트>의 라이토 마냥 미친 듯이 웃어야 했다. 분명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려 했던 인류의 노력과 그에 따른 문명은 무엇을, 어디로, 왜 바꾸고 있었을까? 위대한 목표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아무것도 없기에 그저 허무할 따름이다.

아비게일과 야야가 자신들이 표류한 무인도가 실은 고급 호텔이 있는 휴양지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이미 전복됐던 세계가 다시 한 번 이전의 세계로 순식간에 전복되는 때. 섬뜩하리만치 허무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손으로 가리키는 행위조차 조심해야 했던 선장이 다시 말단 청소부 혹은 뒤치닥거리나 하는 비서가 되어야 한다니. 아니지. 생각해보니 표류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다시 새로운 계급의 피라미드를 만들기도 했구나. 빌어먹을만치 줄세우기를 좋아하는 인간이여... 그러고 보니 나도 인간이다. 이런 XX 똥팔이...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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