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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un 11. 2023

나의 사소한 슬픔 단상

건대입구. 롯데시네마. 나의 사소한 슬픔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이성과 냉소조차 뜨겁게 하는 사소한 감정이란

결코 사소할 수 없는 감정으로 냉소적인 이성을 뜨겁게 하는 영화이다. 솔직히 정말 어려운 영화이다. 언젠가 인식이라도 해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우울 속에서 죽음을 바라는 이들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스스로의 우울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면 그 때 가서야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영화는 우울 속에서 죽음을 바라는 이가 아니라 죽게 해달라는 이의 곁에서 살아달라고 하는 이의 이야기에 가깝다. 하지만 후자의 감정은 전자에 의해 촉발되기에 영화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죽음을 바라는 이들의 감각을 이해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나의 사소한 슬픔>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크게 두 가지처럼 보인다. 하나는 이 영화의 소재인 자살, 안락사, 존엄사에서 기인한다. 죽음을 직시한 채 나아가는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의 사소한 슬픔>은 인간의 상대적 윤리로는 절대로 답할 수 없을 이 질문을 마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자살, 존엄사, 안락사가 주는 중압감은 표면적인 중압감에 지나지 않는다. 즉, 소재 자체가 지닌 윤리적 갈등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나치게 크기에 영화가 어렵게 느껴질 뿐이다.

사실 영화가 어렵게 느껴진 진짜 이유는 영화의 표면적인 소재가 지닌 중압감만으로도 버거운데 영화 대사 전반에 녹아 있는 서구권의 문학 때문이다. 서사 진행 중 인물들이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특정 작가나 작품으로 비유해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인물의 감정에 따른 뉘앙스로 의미는 대충 파악할 수 있지만 파악한 의미가 영화와 어느 정도로 맞닿아 있는지 모르니 답답해진다. 이 답답함은 앞서 언급한 표면적 중압감과 연동해 영화가 사변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고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지도록 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도 버지니아 울프를 제외하면 언급되는 작가들과 작품들은 모두 알지 못해 자살과 관련되었나 보다 하고는 앞뒤 상황과 맞춰 옅은 의미(?)로 유추만 했다.

하지만 영화 자체를 보고 나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바라는 이들에게 세상에 아직 보지 못한 아름다움이 많으니 죽지 마라, 당신이 없어 고통 받게 될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해 죽지 마라 등의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가. 죽음을 바라는 이들이 죽음을 바라게 된 과정과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이미 힘들지만 죽음을 바라는 타인은 특히나 더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도 실제로 죽음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스스로 사선을 넘은 이들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든다.

이러한 거부감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선을 넘은 이들이 다시 사선을 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미 죽음을 바라는 이들에게 삶과 죽음의 위상은 전복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살아달라는 말은 곧 죽어달라는 말과 동의어로 들리지 않을까? 세상 자체가 버틸 수 없는 우울로 가득한 이들에게 그 우울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 것이란 말은 허상이지 않을까? 언니 엘프리다와 동생 욜리의 모습은 서로를 향한 애틋한 감정을 스쳐가듯 보기는 하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는 듯해 안타깝다.

어쩌면 관객이 느낄 안타까움이 <나의 사소한 슬픔>에서 안락사, 존엄사 보다 더 주목하고 있는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죽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축복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다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무기력의 감정. 소중한 이를 떠나 보내야만 한다는 절대적인 선택지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으나 개인적인 슬픔이기에 사소할 수밖에 없는 모순된 감정. 이 감정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멀리 떠난 소중한 이를 어떻게 기억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가 구체화된다. 분노를 두른 채 슬픔에 허우적대며 더더욱 절망할 것인가. 슬픔 이면에 존재하는 추억을 더듬으며 조금씩 다시 일어설 것인가. 어느 쪽이든 사소한 슬픔이 지닌 절대성은 남겨질 이를 위해 떠난 이가 남겨둔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떠나는 순간에도 남겨질 이를 위해 자신을 새기고 떠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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