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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ul 12. 2023

고립된 남자 단상

부천. 부천시청 어울마당. 고립된 남자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작위적 고립에서 인간과 예술을 지루하게 논하다

B.I.F.A.N.에서 본 세 번째 영화이자 세 영화 중 2위를 달성한 영화이다. <가부키초의 탐정 마리코>가 워낙에 별로여서 어부지리로 2위가 됐을 뿐이긴 하다. 사실 <가부키초의 탐정 마리코>와  비교해 지루한 걸로 따지면 월등히 앞서는 편이다. 하지만 윌렘 데포의 연기만큼은 정말 압권이다. 약 103분 정도 되는 시간을 데포 혼자 이끌어 나가는 모습은 경이롭다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경이로운 연기에도 불구하고 설정이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이 들어 연기를 방해한다는 생각이 든다.

<고립된 남자>의 설정은 설정 내적으로는 유기적이다. 고급 예술 작품들로 가득차 있으며 모든 것이 완벽할 것 같은 고급 펜트하우스와 뭔가를 관찰하고 그리는 습관이 있고 그 습관의 모음인 스케치북을 아끼는 도둑 니모. 영화는 집에 불이 났을 때 챙겨나갈 3가지를 말하라는 질문에 고양이, AC/DC 앨범, 스케치북을 챙기겠다고 말하는 니모의 말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 다음 전개가 의미심장하다. 고양이는 결국 죽었으며 앨범은 친구에게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했고 오직 스케치북만이 남았다고 말한다. 결국 니모는 고양이와 음악은 모두 사라지거나 희미해졌고 오로지 예술(Art)만이 영원하다고 말한다.

니모의 말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데 그 때문에 영화는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하다. 펜트하우스의 보안 시스템 오류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 살게 된 니모는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잊게 된다. 펜트하우스는 겉만 번드르르 할 뿐 실제로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물품이 부족한 곳이다. 무한한 시간에 유한한 생명이 짓눌리는 공간에서 니모는 탈출 시도와 포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펜트하우스를 자신의 예술로 채우기 시작한다. '탈출-포기-예술'의 반복은 마치 무한한 시간의 무의미에 예술로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이 모든 일들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가장 1차원적으로 생각해보자. 최고급 펜트하우스의 보안 시스템은 왜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는가? 최고급 펜트하우스의 화제경보기가 울리고 천장 스프링쿨러에서 물이 뿌려지고 있음에도 왜 아무도 오지 않았는가? 혹은 아예 근본적으로 질문을 해보자. 펜트하우스에 갇힌 사람이 예술을 가슴에 품고 사는 니모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는가? <고립된 남자>의 설정은 내적으로는 정합적인 것처럼 보이나 외적으로는 쉽게 무너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경이로운 연기를 보인 월렘 데포의 연기가 빛 바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영화에서 월렘 데포의 연기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워 경이로울 정도이다. 문명의 이기가 집약된 듯한 펜트하우스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혼돈과 파괴의 공간 그 자체로 바뀌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전적으로 월렘 데포의 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심지어 니모가 "나는 산 중턱 위 천국으로 갈 거야."라고 중얼거릴 때는 데포의 낮으면서도 울리는 듯한 중저음에 의해 영화의 공포감과 기괴함이 극대화된다. 데포의 연기만 보기 위해 이 영화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연기에도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 영화는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더 즐겁게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지루하게 인간과 예술을 떠들어댈 뿐이다. 105분이라는, 짧다면 짧은 러닝 타임이 억겁처럼 느껴지는 고요함과 답답함이라니. 서로 단절된 채 지내야 했던 코로나 시기를 버틴 이들에게 갑자기 예술론이라니. 마지막 결말에서 니모가 끝내 탈출을 했는지 결국 목숨을 끊었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영화의 니모처럼 영화라는 시공간에 갇혀 있다가 '나'는 겨우 탈출하는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쉴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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