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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Aug 25. 2023

찰리 채플린 단상

이수. 아트나인. 찰리 채플린 기획전.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모던 타임즈> 어두운 근대에서 희망을 꾸게 하는 웃음의 힘

<시티 라이트> 비정한 웃음의 도시에서 당신만 볼 수 있다면

<황금광 시대> 당신이 있어 의미가 있는 황금

살면서 채플린 영화를 극장 스크린으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런 날이 왔다. <모던 타임즈>, <시티 라이트>, <황금광 시대>. 어린 시절 만화 채플린 위인전에서 본 영화들을 직접 본다는 것만으로도 믿기지 않을 뿐더러 왠지 모를 벅참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들을 몸으로 느끼고 나니 채플린이 왜 그렇게 위대한 희극인이자 영화인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분신 이상의 의미가 있을 떠돌이 찰리(Charlie The Tramp)로 분장하고 연기하는 채플린의 모습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되 멀리서 보면 희극인 삶" 자체인 것 같기 때문이다.

세 영화 중 가장 편안히 본 것은 <황금광 시대>이다. 채플린 영화의 단점은 무성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에서 발생한다. 요즘으로 따지면 저자극에 가까운 콘텐츠이며 동시에 표현의 한계로 일정 부분 계속해서 서사가 반복한다. 특히 슬랩스틱 코미디를 기반으로 한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어 일정 부분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모던 타임즈>나 <시티 라이트>와 비교해 <황금광 시대>는 반복되는 구간이 거의 없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이 떠오르는 유쾌한 전반부와 자신의 사랑을 위해 모험을 떠나는 위대한 후반부가 재미있는 시너지를 내면서 지루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두 영화가 재미없었느냐고 하면 전혀 아니다. 반복으로 지루할 수 있을지언정 <황금광 시대>만큼이나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왠지 모를 쓸쓸함과 아픔에 눈물지었다. 왜일까? 그 이유는 떠돌이 찰리라는 인물에 있지 않을까 한다. 오늘날 나왔다면 찰리 유니버스라는 밈으로 향유되었을 떠돌이 찰리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넘어 현실 삶 곳곳에 남아있다. 때로는 공장 노동자로. 때로는 아무것도 없는 도시 부랑자로. 때로는 가난한 작은 친구로. 매 영화마다 겉모습은 같아도 전혀 다른 찰리가 등장한다.

떠돌이 찰리는 자신의 이름처럼 영화 외적으로도 이 영화 저 영화를 떠돌고, 영화 내적으로도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힘겨운 삶에서 언제나 더 나은 꿈을 꾸며 슬프게 웃는다. 그리고 그가 슬피 웃으며 꾸는 꿈은 낭만적이게도 사랑이다. 거리의 부랑자 여인과 하는 안정된 사랑이나, 자신을 볼 수 없는 여인의 사랑이나, 자신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여인의 사랑 등. 현실의 삶이 고달프다 해 울기만 하지 않고 오히려 보란 듯이 씨익 웃으며 넘긴다.

오늘날에 찾기 어려운 비약의 힘이 아닐까 한다. 아니 어느 시대에건 필요하다고 말해질 뿐 실제로 도달하기 어려운 힘일 것이다. 조금씩 매일 웃으며 나아가다 보면 그 순간이 새벽이건 황혼이건 계속 나아가며 살아가고 있을 텐데. 살아가고 있는 그 순간이 불행이면서도 행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리고 그 삶이 행복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당신 곁에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일 텐데. 어차피 힘겨운 세상에서 슬픔을 발판 삼아 미소와 대소를 지으며 사랑을 찾아 살아가는 것은 떠돌이 찰리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비극 속에서 먼 희극을 찾는 우리는 모두 떠돌이 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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