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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Sep 15. 2023

빈센조 단상

넷플릭스. 빈센조.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지옥을 향해 나아가매 멋이나 챙기려 하누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드라마이다. <빈센조>는 악을 악으로 징벌해 정의를 달성한다. 선은 악을 이길 수 없으니 악을 악으로 징벌하며 정의를 달성하겠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가 통용되는 혹은 통용될 수밖에 없는 세계에 살고 있기에 <빈센조>와 같은 드라마가 인기가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아가 그러한 인기의 발현에 뜨끔하면서 반성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빈센조>와 같은 드라마는 굉장히 긍정적인 드라마일 것이다. 하지만 <빈센조>는 긍정적으로 보기에는 안일한 태도로 자신의 논리를 배설하기만 해 안타깝다.

<빈센조>는 아주 극단적인 형태의 권선징악 드라마로 사실상 이 드라마의 끝은 완전한 무(無) 상태라 할 수 있다. 없음은 문명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없음, 즉 자연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 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서 홉스의 자연에 가깝겠다. <빈센조>는 악을 악으로 징벌하는 과정에 대해 문명과 사회의 시스템이 선이 아닌 악을 수호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시스템이 아니라 악에 직접 저항하는 방식으로만 자신을 지키고 정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본다.

<빈센조>의 방식은 일견 가슴이 시원해지는 사이다 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빈센조>의 방식은 드라마의 빈센조 같은 능력이 없는 이상에는 사이다를 유발하지 못하며 오히려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게 한다. 시스템은 구성원의 존립을 위한 마지노선이다. <빈센조>는 그 마지노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마지노선을 무시하고 스스로가 나서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과연 <빈센조>가 이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빈센조>의 갈등이나 위기는 모두 빈센조 개인의 능력으로 해결된다. 금가 프라자 거주민들도 나름 각자의 능력이 있다고 하지만 빈센조가 없는 상황에서는 그 능력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빈센조와 같은 정의로운(?) 악당이 없을 때 어떻게 시스템의 보호가 없는 상황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저항할 수 있는가? <빈센조>는 약자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저항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듯하지만 이조차도 빈센조의 존재로 좌지우지 될 뿐이다.

심지어 <빈센조>는 아주 위험하게도 인간의 존재 여부를 구분한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괴물, 그 괴물에게 빌붙는 또다른 괴물, 괴물들에게 고통받는 인간. <빈센조>의 인간은 이렇게 나눌 수 있겠다. 이러한 구분에서 알 수 있듯 <빈센조>는 절대악을 상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에 있을 절대선은 상상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절대선은 유니콘 같은 존재로 상정한 듯하다. 그렇다면 <빈센조>에서 말하는 정의는 대체 무엇일까? 생존을 위해 시스템 조차도 무시하고 저항해 달성하는 그 정의는 대체 무엇일까?

<빈센조>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드라마로 느껴지는 이유는 현실을 절대악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악을 악으로 징벌해야 하는 세계에서 빈센조와 같은 악이 없으면 약자는 아무리 뭉쳐도 계속 침탈당할 존재일 뿐이다. 가장 절대적 약자는 그나마 보호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잃을 것이고 사이다라는 명분 속에서 악은 멋이나 챙기며 정체 모를 정의를 달성할 것이다. 과연 선은 악을 이길 수 없는가? <빈센조>와 같은 드라마에서 악에 대한 풍요로운 상상과 비교해 하찮다는 말로 부족한 선에 대한 빈곤한 상상을 경계해야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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