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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May 06. 2022

때가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깨끗함

도라마코리아. 사랑입니다! ~ 양키군과 하얀 지팡이 걸 ~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끔 빌런이 없는 드라마라는 평을 받는 드라마가 있다. 마냥 선한 것도, 마냥 악한 것도 아닌 인물들이 각자의 소박한 목표를 두고 투닥투닥해 힐링 드라마라고도 불린다. 야심이나 야망과 같은 단어가 낭만적으로 느껴지고 이른바 N포 세대가 등장할 정도로 개인이 자기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세상에서 너무 거창한 야망을 두고 갈등하는 드라마는 현실에서 느끼는 피로도를 그대로 드라마에서까지 느끼게 한다. 번아웃이 오기 직전까지 개인을 내모는 경쟁 사회에서 연애와 같은 소박한 관계마저도 욕심으로 보이니 드라마로 편하게 간접 체험하고 끝내고 싶어진다. 너무 큰 목표를 향해 인물들이 온갖 감정을 나누며 갈등하는 야망의 드라마보다 빌런 없는 드라마, 일상마냥 잔잔하면서도 소소하게 재밌는 힐링 드라마가 뜨는 이유이다. 하지만 빌런이 없는 드라마라고 해서 정말 빌런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저 놈 저저저!", "저 XXX"할 정도로 대놓고 빌런인 인물이 없는 것이지 여전히 빌런은 존재한다.


마냥 선하지도 마냥 악하지도 않다는 것은 누구나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다면적인 인물이란 뜻이다. 즉, 주인공을 포함해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상황에 따라 보이는 다양한 감정과 반응으로 때로는 선하게 때로는 악하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힐링 드라마는 자칫 잘못하면 이도저도 아닌 드라마가 될 수도 있다. 선악이 모호하다는 개념이 다면성, 다양성, 다향성으로 재현되는 것이 무색무취로 재현되는 것이다. 이때 무색무취는 순수로 이어지면서 선의 이미지로까지 나아간다. 선악이 모호해 빌런이 없는 드라마가 오로지 착하기만 인물들로 가득한 드라마가 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빌런 없는 드라마 중에는 서사에서 각 인물의 목표에 따른 갈등이 거의 돋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시청자가 드라마의 서사나 인물에게서 느낄 수 매력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무해하고 잔잔하게 힐링 느낌을 내려다가 오히려 잔잔하게 사라져버리는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일본 드라마 <사랑입니다! ~ 양키군과 하얀 지팡이 걸 ~>(이하, <사랑입니다!>)이 처음과 다르게 고만고만하게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출처. 도라마코리아

사실 <사랑입니다!>는 소재만 보면 굉장히 날카롭고 새롭다. 시각 장애인과 일반인의 사랑이라는 소재에 대해서 <사랑입니다!>는 시각 장애인이 되는 시기와 정도에 따라 다 같은 시각 장애인이 아니라는 점, 서로 다른 시각 장애인마다 다른 갈등 지점이 있다는 점, 시각 장애인이 불량한 성인 백수인 양키(ヤンキー)와 사랑한다면 서로를 바라보며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등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날카로운 관점은 주제의식으로까지 나아가 시각이라는 소재를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사회에서 제대로 인식하고 배려하지 못한 시각 장애인의 영역, 세상과 상대를 바라보는 관점과 대하는 태도 등과 연결하기 때문에 드라마의 서사가 단순한 남녀의 로맨스로만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매력적인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편하게 넘길 수 있는 소재를 최대한 많이 조사하고 분석해 그것을 주제의식으로까지 연결했다는 점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출처. 도라마코리아

드라마의 시작도 시각 장애인의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어둡고 칙칙한 것이 아니라 "밝고! 희망차고! 귀엽게!"라는 듯 배우 전반의 연기 톤이 가벼우면서도 오버하는 모습이고 화면의 색감과 톤도 밝고 화사하게 유지하고 있다. 특히 약시 시각 장애인인 아카자 유키코와 양키인 쿠로카와 모리오의 로맨스가 시작하는 사건은 <사랑입니다!>가 현실의 일상남녀 간 사랑을 과장해서 연출하는 로맨틱 코미디의 관점에서 시각 장애인의 사랑을 일상남녀의 사랑과 비슷한 층위로 올리려는 듯하다. "어맛! 뺨을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와 비슷하게 맹학교를 가는 길에 갑작스러운 시비로 양키인 모리오 일당과 마주친 유키코가 모리오의 안 좋은 곳을 차면서 시작되니 말이다. 이러한 시작을 통해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유키코-모리오의 로맨스는 시각 장애인과 양키대한 편견과 차별, 미비한 사회 인식과 시스템 등으로 절대 일상남녀와는 비슷할 수 없음이 오히려 부각되고 그에 따라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 역시 가능해진다.

출처. 도라마 코리아

문제는 이러한 역전 현상과 달리 <사랑합니다!>는 서사가 진행될수록 사건에 대한 인물들 개개인의 반응, 반응의 연쇄에 따른 갈등, 갈등의 해소 등 인물의 변화가 단조롭다. 유키코를 비롯한 가족과 맹학교의 친구들, 모리오를 비롯한 모리오 일당과 카페 사람들, 라이벌 시시오 등 총 10명의 인물이 있음에도 감정의 변화는 역동적이지 않다. 상대에게 서운함, 분노, 슬픔 등을 표현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표현한다고 해도 상대 역시 그 감정에 순수하고 착하게만 반응한다. 시각 장애인인 동생이 항상 걱정되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싸고 도는 언니 이즈미에게 유키코가 이즈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화를 내고 홀로 서기를 하고 싶다는 에피소드에서만 어두운 감정과 반응이 나타난다. 해당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사건마다 "좋은 좋은 거지!"하며 순수하고 착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반응하는 인물의 변화는 가볍고 과장된 연기 톤까지 겹치며 더욱 깊이감을 잃어버린다.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은 관계에서도 크게 흔들리는 일 없어 극 전체가 단조로워진다.

출처. 도라마코리아

이러한 극의 단조로움은 시각 장애인과 양키에 대한 편견과 차별, 미비한 사회 인식과 시스템 등 텍스트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부분들까지 무게감을 잃게 한다. 시각 장애인인 유키코의 일상과 정상인이되 양키인 모리오의 일상은 분명 다르기에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 있을 수밖에 없고 각자의 상황에 따라 동일한 사건도 다르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물들이 갈등하는 사건에서 인물의 변화가 크지 않은 것은 서로 다른 두 인물의 상황을 날카롭게 포착해 사건화 하기보다는 피상적으로 인지하면서 갈등의 장인 사건 역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길을 걸을 때도 행인, 벤치, 자동차 등에 다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유키코와 모리오의 인식과 행동에 집중하던 드라마는 점점 둘의 차이를 주변 인물로 확장해 반영하면서 포괄적인 사건 속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개성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극 중 사건을 현실에서 시각 장애인이 겪는 일상으로 연결해 분석해주는 실제 시각 장애인 코미디언의 등장도 실질적인 시각 장애인의 어려움을 깊이 있게 말해주기 보다는 시각 장애의 특성을 설명하는 정도로 끝나고 만다.

출처. 도라마코리아

드라마에서 반드시 빌런이 등장해야 한다거나 인물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물들이 사건에서 서로에게 희노애락의 다양한 감정을 통해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고 충돌하며 갈등을 쌓고 해결해야 한다. 인물 개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과 그에 따라 인물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소재에 대한 드라마의 관점과 방향성 즉,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필수 과정인 것이다. 빌런 없는 힐링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빌런이 없다는 말은 무해하고 순수한 인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선악이 모호한 가운데 누구나 선인이 될 수도 악인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상황에 따라 인물 관계가 변화하는 가운데 소재에 대해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의 힐링 포인트는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잔잔한 힐링 드라마의 힐링이 현실의 지친 일상에 대한 치유의 순간일 수 있는 이유는 순간순간의 극 중 갈등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계속 깨끗해서는 깨끗한지 알 수 없다. 서로 좌충우돌 하며 때가 묻어야 비로소 서로를 씻어주며 깨끗해질 수 있다.



사진 출처. 도라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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