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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Dec 27. 2022

'나'다움을 함께 찾는 여정에 관하여

미아리고개예술극장. 얄라리얄라. 즐거운 너의 집.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다움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집이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다. 취향, 인간상, 삶의 자세 등이 교차하며 자기다움의 집을 꾸민다. 동시에 타인의 취향, 인간상, 삶의 자세 등도 덧붙여진다. 타인과 교류하는 가운데 다채롭게 형성된 자기다움을 통해 인간은 세상을 놀이터로 여기며 짓눌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정보와 사실의 범람 속에서 당장 먹고 사는 걱정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의 인간에게 타인과 교류하며 자기다움을 형성하는 것은 피로하다. 쿨하다 혹은 힙하다라고 느끼는 1차원적인 감각들만 즐기는 것이 더 편하다. 무엇이 쿨하고 힙한지가 정리되지 않은 이미지. 그런 이미지를 즐기는 단편적인 캐릭터로서 자신. 1차원적인 감각에 의지했다는 것 외엔 기반이 없어 조금만 충격을 줘도 흔들린다. 단편적이면서 정제되지 않아 날카로운 환상에 의지해 고슴도치 같은 삶을 살아간다.


고슴도치와 같은 삶을 사는 인간은 자신의 환상에 갇혀 사는 것과 같다. 타인은 삶을 다채롭게 만드는 희망이 아니라 삶을 망가뜨리는 공포이다. 불안한 자기다움의 환상은 수많은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타인에 의해 흔들리고 무너지려 한다. 흔들리고 무너지려는 환상을 부여잡고 우리는 제발 그만 비집고 들어오라며 타인을 밀어내고 현실을 부정한다. 그럼에도 노출된 틈새로 들어오는 타인에 자기다움은 무너지... 놀랍게도 비집고 들어오는 타인은 틈새를 메워주며 자기다움을 더 단단하게 한다. 자신을 가둔 불완전한 자기다움을 깨고 나와 타인으로 메워진 새로운 자기다움에 걸음마를 떼며 다시 현실을 살아간다. 타인과 함께 걸음마를 떼는 삶은 자기다움을 즐길 수 있는 놀이터가 된다. 얄라리얄라의 <즐거운 너의 집(원제, Home, I'm Darling)>이 전해주는 삶의 행복론이다. 


1. 환상과 현실의 낙차가 주는 서늘함과 두려움

파스텔 톤의 화려한 원색 혹은 체크무늬의 벽과 간결하면서도 기능적인 미드 센츄리 가구로 꾸며진‚1950년대의 환상이 가득한 주디의 집이 보인다. 파스텔 톤의 화려한 원색 인테리어와 체크무늬로 그려진 옷. 직접 말아 올려 컬이 살아있는 헤어스타일. 매일 아침 구운 토스트와 방금 내린 커피 향이 풍기는 부엌. 신사처럼 차려 입고 정중하게 행동하는 남편의 출근길을 배웅하는 자신. 모든 것을 직접 하는 아날로그의 낭만이 살아 숨쉰다. 모든 것을 책임지고 직접 하는 50년대는 공동생활과 공동육아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책임지지 않은 1세대 페미니스트 엄마를 대신해 주디를 위로하는 따뜻한 시기이다. 회사 인원 감축 계획으로 퇴직 권고를 받자마자 남편 조니에게 퇴직 후 50년대 가정주부처럼 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주디에게 50년대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해 자신이 선택하는 탈출구이자 시작이다.


관객은 화려하면서도 정돈된 주디의 집을 보며 주디의 선택에 공감하게 된다. 원색이 교차하는 체크무늬 벽지.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색상을 지닌 빈티지 가구.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거실. 환상적이다. 앤틱한 찻잔과 식기류로 가득한 부엌의 찬장. 그 위를 차곡차곡 채우고 있는 양념과 시리얼 전용 보관함. 완벽하다. 집밖일만 하느라 남편 조니보다 요리를 못하던 주디는 청소와 요리는 기본이요 디저트를 위한 베이킹이나 칵테일 메이킹까지 완벽하다. 스타일리스트이자 친한 동생 프랜에게 50년대 가정주부들의 집안일 성경을 건네며 집안일을 전도하는 주디의 모습은 "그래, 네가 좋다는 데 뭐 어떠니?"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실까지 탄탄해 보이는 주디의 집을 보면서 관객은 주디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잘 선택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비록 조니의 승진 소식이 조금 늦었지만 가장 오래 일한 조니가 이번에는 반드시 승진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50년대의 환상으로 꾸며진 주디의 집은 모든 것이 화려하고 완벽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완벽함이 관객에게는 불안하다. 끔찍히도 행복하다 말하는 조니는 주디를 사랑해 지금의 생활을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승진을 기대하는 주디에게 오히려 너무 기대하지 말라며 승진 얘기는 피하기만 한다. 부품이 없어 매번 손수 임시로 수리해야 하는 불안한 냉장고와 50년대와 맞지 않게 싱크대 밑에 숨겨둔 애플 노트북은 50년대의 삶을 무조건 고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주디가 자신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 무진장 애쓰고 있음을 알게 한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집안일에 미쳐있다 말하는 페미니스트 엄마에게 자신의 선택으로 가정주부가 된 것이라 말하는 주디의 모습은 엄마와 갈등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감도 없다. 사랑하는 조니에게 더 이상 50년대의 환상을 유지할 자본이 없다는 진실을 숨긴 채 주디가 억지로 환상을 이어가려 할수록 관객의 불안은 커져만 간다. 환상에 사로잡힌 채 빠져나오지 않으려는 주디의 모습은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하다. 환상과 현실 사이 낙차가 주디를 관통해 관객에게 전해진다. 서늘한 두려움이 극장을 채운다.     

2. 서늘함과 두려움을 넘어 차차차!

주디가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은 2개의 사건으로 점점 틈이 벌어진다. 하나는 사랑하는 조니의 변심이고 다른 하나는 절친한 동생 프랜의 남편 마커스의 성추행이다. 조니의 변심은 50년대의 환상을 두들기는 외부의 노크이다. 사랑하기에 3년 동안 50년대의 생활을 한 조니는 사랑하기에 변심하기 시작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터놓는다.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며 활기찼지만 집안일에 심취한 채 사람도 안 만나며 사교 춤 모임만 기다리는 주디에게 더 이상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퇴직하기 이전의 주디를 떠오르게 하는 상사 알렉스에게 호감이 생긴다고. 절대 배신할리 없다고 믿었기에 조니의 발언은 주디에게 환상을 부수러 온 폭탄과 다름없다. 


하지만 조니는 주디의 환상을 완전히 가루로 만드는 폭탄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조니도 사랑의 방패로 끔찍한 행복의 화살을 버티는 와중에 일에 대한 자신감과 대인관계 등 자기다움을 왜곡 당했다. 그렇지만 조니는 주디를 원망하지 않는다. 바깥에서 두들기며 주디가 자신과 함께 자기다움을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랄 뿐이다. 비록 자신의 발언에 주디는 적어도 바람피우는 걸 들키지 말아달라고 말하며 노크에 응답하지 않아 한숨만 깊어지지만 조니는 기다린다. 주디만큼이나 조니도 주디를 사랑하기에.

조니가 바깥에서 노크를 한다면 마커스의 성추행은 50년대의 환상을 울리는 내부의 경종이다. 직장 내 성추행으로 집에서 근신 중인 마커스에게 비서로 일하겠다는 주디의 결심은 50년대의 환상을 향한 마지막 집착이다. 자신의 행동이 괜찮냐고 물으며 서서히 내려오는 마커스의 손길에 주디는 내심 멀리 하던 페미니즘을 떠올린다. 중산층 이성애자 백인 남성의 천국으로서 50년대가 환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마커스의 성추행 혐의를 관심 받고 싶어 하는 여성의 일탈이라 여기며 프랜을 위로했거늘․ 50년대의 현실을 일깨우며 마커스의 비서를 옹호한 엄마가 마커스를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한다고 생각했거늘. 성추행 피해자의 행동이 자신에게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내부에서부터 주디의 환상이 깨진다.


외부의 노크와 내부의 경종을 거치면서 주디는 50년대의 환상을 대신할 새로운 자기다움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조니는 주디에게 50년대의 삶을 포기하자 말하지 않는다. 삶의 일부인 50년대를 즐기면서도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며 사랑하자고 말한다. 집밖일을 하며 바깥에서 친구를 만나는 순간. 느지막이 일어나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서 함께 피자를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순간. 남편에게 요리를 해주는 대신 남편의 요리와 칵테일을 즐기는 순간. 춤추기 싫어도 오늘만큼은 50년대 복장을 갖추고 아내와 춤추며 행복해 하는 순간. 다양한 삶의 모습을 상상하며 주디는 조니와 함께 행복을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자기다움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춤을 춘다. 차차차!

"나다운 게 뭔데?" 중2병이 흘러 넘치는 이 말에서 우리는 사실상 '나'답다라는 것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기답다고 하는 면은 자신의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다. 그 일부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너무 깊이 기대고 있어 일부 이외에 다른 면들을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를 잊고 있는 걸 게다. 그리고 다른 면을 발견하는 재미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할 때 더욱 풍성할 것이다. 마침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타인이 있다. 굳이 그 타인 모두와 재미를 느끼려고 애쓸 필요도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저 다가오는 이들, 함께 하고 있는 이들. 그들과 재미를 느낄 준비만 해도 우리 각자의 자기다움은 멀리서 보면 눈부실 것이요 가까이서 보면 형형색색으로 칠해져 있을 것이다. 가끔은 다른 이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물어보자. 누군가 당신과 함께 찾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다운 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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