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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an 12. 2023

무대를 넘어 현실로 스며드는 숭고함에 대하여

한전아트센터. 두 교황 & YES24스테이지. ART.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22년 연말 들어 영화만이 아니라 공연을 보려고 애썼다. 스크린이라는 물리적인 제 4의 벽 대신 가상의 제 4의 벽을 쳤음에도 무대 위 모든 물성이 피부로 느껴지는 공연은 영화와는 다른 매력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보호막 없이 휘몰아치듯 느껴지는 그 물성이 너무 날 것 그대로라 어색하거나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어색함이나 버거움 등의 느낌이 익숙해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정동을 맞이할 수 있다. 특히나 가상의 제 4의 벽을 넘어 침투하는 배우의 육체성은 영화 속 배우가 스크린을 넘어 침투하는 것 보다 더 큰 정동을 일으킨다. 때때로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풀어질지를 모르는 정동은 순간순간 떠오르는 공연의 잔상에 의해 다시 엮이고 단단해져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한다. 각각 작년 10월과 12월에 관극한 <두 교황>과 <ART>에서 느꼈던 정동은 지나간 공연의 잔상을 다시 한 올 한 올 짜더니 눈앞에 공연을 재연시켜 기어코 다시 눈물을 흘리게 한다.


연극 <두 교황>과 <ART>에서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형언하기가 어렵다. 표현하자면 숭고에 대한 경이인데 대체 무엇을 숭고하게 느껴는지, 그리고 숭고에 대한 느낌이 어떻게 경이로까지 이끌려 갔는지 형언하기 어렵다. <두 교황>과 <ART>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두 교황>은 카톨릭 전통을 수호하는 베네딕토 16세가 사임하기에 앞서 종교적으로 진보를 실천하는 베르고글리오 추기경, 현 프란치스코 교황과 대담하는 이야기이다. <ART>는 유명 모더니스트 화가 앙뜨로와가 흰 바탕에 흰 선을 그은 그림을 5억이나 주고 산 세르주에게 친구 마크가 화를 내고 친구 이반은 둘의 싸움을 말리는 이야기이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돌이켜 보면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보통 서사와 이야기를 즐기는 필자로서는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간간히 차오르는 경이의 감정으로 흘리는 눈물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다행스럽게도 경이를 느낀 순간을 되감아보면서 한 가지 단초를 찾을 수 있었다. '되는 것'과 '그 자체인 것'의 차이이지 않을까 싶다.

1. '되는 것'으로서 연기와 '그 자체인 것'으로서 연기

일반적으로 연기는 특정 성격을 지닌 그럴듯한 인물을 배우가 자신의 신체로 형상화하는 작업이라 정의할 수 있다. 신체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곧 모방을 한다는 의미이다. 서양 연극 전통에서는 이러한 모방을 말 그대로 모방이라는 의미의 Imitation과 구분해 연기로서 모방인 Mimesis로 정의한다. 둘을 비교하기 위해 간단하게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컵에 담긴 물을 마시는 사람을 모방한다고 해보자. 컵에 담긴 물을 마시는 사람은 손을 컵으로 가져가는 행동, 컵을 쥐는 행동, 컵을 들어올리는 행동, 입을 벌리는 행동, 물을 마시는 행동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겉모습만 모방하는 Imitation은 각 행동이 완벽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겉모습만 모방한다는 것은 행동에 어떠한 목적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컵에 담긴 물을 마시는 사람'에는 어떤 컵인지, 어느 정도 온도의 물이 담겨 있는지, 마시는 사람은 지금 얼마나 목이 마른지 등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다. Imitation과 달리 연기로서 모방인 Mimesis는 각 행위에 적절한 목적을 부여해 행위를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구분된 행위가 적절한 순간에 행해질 때 눈 앞에 인물은 물(物)이 아니라 인(人)이 된다. 결과적으로 연기는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 적절한 목적을 부여해 대사와 행동을 적절한 단계를 가진 행위로 구분하고 이를 신체로 적절한 순간에 형상화하는 모방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연기라는 것은 어떤 존재 혹은 상태로 '되는 것'처럼 보인다. 연기로서 모방인 Mimesis는 마치 배우의 몸에 배우가 아닌 새로운 인간상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인간의 신체는 의식을 지운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육체로 인지되어 어떤 존재 혹은 상태가 될 수 있는 백지 같은 상태로 인지된다. 이렇게 보면 연기를 할 때 배우는 백지 상태인 육체에 목적을 부여해 육체에서 벗어나면서도 자신의 신체로는 되돌아가지 않는 두 개의 탈피 과정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연기를 할 때 자신의 신체를 인지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를 백지 같은 상태인 객관적인 육체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체를 인지하지 않으면서도 객관적인 육체로 자신의 육체를 생각한다는 것은 몸에 존재하는 자신의 의식을 완전히 지워내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몸과 정신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신체와 육체는 불가분의 관계로서 배우는 몸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면서도 몸으로 어떻게 주어진 존재 혹은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주어진 존재 혹은 상태를 자신만의 존재 혹은 상태로 인지하고 되어가 종국에는 자신만의 존재 혹은 상태 그 자체인 것이 되어 있는 것이 연기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기로서 모방인 Mimesis는 어떤 존재 혹은 상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 혹은 상태에 '나'를 부여해 자신만의 존재 혹은 상태 그 자체인 것으로 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어떤 존재 혹은 상태 그 자체인 것으로서 연기와 단순히 어떤 존재 혹은 상태가 되는 것으로서 연기는 명백하게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 어떤 존재 혹은 상태로 되는 것처럼 보이는 연기는 자신의 몸에 새로운 인간상을 덧씌우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위해서 배우의 몸은 의식을 가진 신체가 아닌 대상으로서 육체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인간의 의식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의식과 신체 모두 사라지거나 육체가 될 수는 없기에 어떤 존재 혹은 상태가 목표인 경우 되는 것으로서 연기에서 배우와 인물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흔히 '쪼'가 보인다는 말로 명명되는, 배우와 인물 사이의 간극이 보이는 순간은 무대 위 극의 세계와 실제 현실 세계가 분리되지 못하고 연속된 채로 남아 있게 해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위 극의 세계에 지루함을 느끼게 한다. 극의 세계는 현실 세계 내에 존재하되 현실 세계와 다른 세계여야 한다. 그래야 관객은 현실을 잠시 잊고 극의 세계에 몰입하거나 극의 세계에서 현실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연기는 관객이 극의 세계를 현실 세계와 구분해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인식하게 하는 물질성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존재 혹은 상태가 되는 것으로서 연기가 Imitation에 해당한다면 그 자체인 것으로서 연기는 Mimesis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자체인 것으로서 연기는 극의 세계를 실재하는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물질성이다.

2. 타인이 된다는 숭고함과 숭고함에 닿으려는 관객

하지만 인공적인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아닌 인간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실재하는 배우의 존재와 달리 인물은 인공적인 대상이다. 아무리 연기를 Mimesis라 정의한다고 해도 Mimesis는 하나의 경지처럼 느껴지며 그 과정은 수많은 Imitation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두 교황>과 <ART>의 배우들이 펼친 연기는 Mimesis인 것에 반해 다른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텍스트에서 본 연기가 Imitation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봤던 연기와 다르게 <두 교황>과 <ART>의 연기는 Mimesis 혹은 그것에 가까운 연기였다고 할 것이다. 두 극의 연기에서 눈앞에 있던 배우의 신체는 단순히 배우 혹은 인물로 딱 잘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와 인물이 완전히 합일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즉, 눈 앞의 신체는 배우이면서도 인물이었기에 배우와 인물 둘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으면서도 어느 한 쪽만 보이지는 않는 상태였다.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가 보이면서도 인물 그 자체가 현현한 신체는 인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이해되는 기분은 숭고함에 대한 경이로 이어졌다. 타인이 된다는 숭고함을 향한 경이 말이다.


관람한 두 연극의 공통점이라면 원로 배우 분들께서 무대에 선 연극이란 것이다. <두 교황>은 배우 신구 님과 배우 정동환 님이, <ART>는 배우 이순재 님과 배우 백일섭 님과 배우 노주현 님이 무대에 올랐다. 스크린에서만 보던 원로 배우들의 연기를 스크린이라는 벽 없이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감만으로 예매를 했다. '내 생에 언제 이 분들이 함께 무대에서 연기하시는 걸 볼 날이 있을까?'라는 기대감이 어쩌면 숭고에 대한 경이의 시초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대감이 크면 실망도 클 수 있는 법이다. 러닝타임만 150분인 <두 교황>에서 무대는 신구와 정동환의 연기로만 거의 120분을 채웠으며 100분인 <ART>는 100분 동안 이순재, 백일섭, 노주현의 연기로만 채워진다. 그 와중에 두 연극에서 원로 배우들은 모두 대사를 잊거나 더듬는 등 실수를 연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른 것도 아닌 대사 실수는 눈과 귀 모두로 확인할 수 있는 실수이기에 공연을 보는 내내 불안을 가중시켰다. 일반적인 경우에 연발되는 실수는 극에 대한 몰입을 깨뜨리며 관람 자체를 지루하고 곤욕스러운 순간으로 느끼게 하니 말이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배우들의 대사 실수가 오히려 눈 앞의 배우들을 배우가 아닌 인물이 현현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단초가 될 줄이야.


배우가 대사를 더듬거나 잊는 실수를 하는 것은 단순히 대사를 더듬거나 잊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극의 세계는 인공적인 세계인만큼 현실 세계에 존재하되 다른 세계이다. 현실과는 분명 차이가 있는 세계인 극의 세계는 현실과 아슬아슬한 경계를 두고 겹쳐져 있는 것이다. 이 아슬아슬한 경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극의 현실감이며 현실감은 극의 수많은 요소를 통해서 유지된다. 이 중 배우의 연기가 극의 현실감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물질성임은 분명하다. 특히 연극과 같은 무대 공연에서 배우의 연기는 신체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움직임, 목소리, 의상, 소품 등과 상호작용하면서 극의 세계에 살아있는 물질성을 부여한다. 극의 세계는 배우의 연기만이 아니라 수많은 스텝들의 노력이 더해져 만들어지지 않지만 동시에 배우의 연기는 수많은 스텝들의 노력을 대신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배우의 신체는 극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신체는 극의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과 상호작용해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서 의지를 발현한다.


이렇듯 극의 세계에 살아있는 물질성을 부여하는 배우의 신체에서 대사는 관객에게 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에너지 물질이다. 단순히 발화되는 말이 아니라 인물을 구성하고 극의 세계를 구축하는, 살아있는 물질이다. 관객은 배우의 신체를 덮고 있는 의상, 신체에서 연장된 소품, 신체의 움직임 등에 더해 대사가 가진 소리성을 통해 현실 세계와 겹쳐진 경계를 넘어 극의 세계로 들어간다. 눈으로 보이는 배우의 신체는 청각을 자극하는 소리성이 겹쳐지면서 인물화를 넘어 한 명의 인간이 된다. 그렇기에 배우가 대사를 잊거나 더듬는 실수는 단순히 대사 하나를 잊거나 더듬는 것이 아니라 극의 세계를 흔드는 것이다. 세계를 구축하는 요소 중 하나가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인공적인 극의 세계를 현실 세계와 구분하는 아슬아슬한 경계는 희미해진다.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은 곧 관객이 극의 세계가 지닌 물질성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극의 세계가 허상이라는 것을 모르는 관객은 없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극의 세계가 지닌 물질성은 관객을 극의 세계에 몰입하게 해 고단한 현실 세계를 잊게 한다. 이는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극의 세계라는 허상에서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어가는 것이자 새로운 대안 세계의 상을 통해 또 다른 현실을 꿈꾸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극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은 관객이 갑작스럽게 고단하고 피로한 현실을 깨닫도록 한다.

이는 <두 교황>과 <ART>를 보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사를 더듬거나 잠시 대사를 잊은 듯한 찰나의 순간을 보고 듣는 순간 너무나 안타까우면서도 극의 세계보다 좁고 불편한 관객석, 주변 관객들의 움직임과 숨소리 등이 느껴져 피로감이 몰려왔다. 차오른 기대감 만큼이나 실망으로 고꾸라지는 듯한 느낌은 낙담과 피로를 한꺼번에 가지고 오는 듯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무대 위 배우들의 신체가 다르게 인지되었다. 베네딕토 16세를 연기하는 배우 신구 님과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을 연기하는 배우 정동환 님은 조금씩 대사를 잊거나 더듬으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신구 님과 정동환 님이 사라지고 베네딕토 16세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무대 위에 서있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베네딕토 16세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라니. 하지만 눈 앞에서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나이가 들어 허리가 굽고 발을 간신히 떼며 걷는 베네틱토 16세는 자신의 고집은 절대 꺾지 않는 의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며 말을 통해 그 의지를 바깥으로 뻗어 냈다. 그 의지는 과거의 죄에 대한 회한으로 교황으로서 자격이 없다 말하는 늙은 종교인의 신체를 거쳐 완고하게 거절하고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로 드러나 소리를 통해 다시 되돌아갔다. 두 사람의 의지는 더듬거나 잠시간의 침묵이 껴있는 말과 함께 때로는 힘겹지만 굳세게 뻗어지는 팔과 손을 통해 때로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으면서도 굳건하게 땅을 딛는 다리와 발을 통해 무대를 넘어 현실 세계에 현현했다.


<ART>도 마찬가지다. 배우 이순재 님은 거의 흔들리지 않고 대사를 이어갔지만 배우 백일섭 님과 노주현 님은 간혹 대사를 더듬으셨고 아예 대사를 통째로 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즐거운 웃음을 선사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크, 이반, 세르주라는 인물이 무대에 실체화 하도록 했다.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ART>에서 한국어가 유창한 인물들이라니. 한국 배우들이지만 이름은 전혀 한국스럽지 않다는 그 간극은 관객이 1차적으로 극의 세계에 몰입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라 할 것이다. 하지만 무대에는 어느 순간 마크, 이반, 세르주가 흰 바탕에 흰 선이 그어진 그림을 두고 싸우다 결국 서로의 우정마저도 의심하고 있었다. 세르주가 자신을 평소에 무시한다고 느끼는 마크는 흰 바탕에 흰 선이 대체 무슨 예술이냐며 진중한 몸에 굵으면서도 칼칼한 목소리로 세르주에게 내갈겼다. 반대로 마크가 오히려 자신의 지식과 지위를 무시한다고 느낀 세르주는 흰 바탕에 흰 선이 지닌 아름다움도 모른다며 나긋나긋하면서도 여유있게 하지만 불편함은 감추지 않고 받아친다. 셋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사람 좋게 웃으며 둘 사이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던 이반은 자신을 박쥐 취급하는 두 사람이 서운해 둔한 몸을 간신히 움직이면서도 억울하다는 듯 시무룩하고 뚱하게 반응한다.


평소에는 대사가 정확하게 처리되지 않거나 짧지만 사이가 붕 뜬 것이 명확하다면 극에 대한 흥미와 관람을 유지하기 위한 긴장이 떨어졌을텐데 두 연극에서는 흥미와 긴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아졌다. 높아지는 것에서 끝이 아니라 극의 서사가 주는 감동을 넘어 눈 앞에 펼쳐진 배우의 연기에 감명을 받아 눈물을 쏟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갑작스럽게 경험하다 보니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대체 무슨 이유가 있는지 스스로에게도 되묻기까지 했다. 그러다 연극을 하는 친구와의 대화 중 답을 찾게 되었다. 무대 위 극의 세계는 스크린 속 극의 세계와 다르게 무대 위의 물질성에 노출되어 있다. 스크린 속 극의 세계는 스크린이라는 명확한 벽을 인지하고 있는 반면 무대 위 극의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4의 벽을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의상, 소품, 조명, 음악, 배우 등 모든 물질에 관객은 노출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무대 위 극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 경계는 스크린 속 극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 경계 보다 더 아슬아슬하게 형성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무대 위 극의 세계는 스크린 속 극의 세계 보다 관객에게 쉽게 허상임을 들키기 쉬울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지가 몸에 즉각적으로 느껴진다. 반대로 말하면 허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인지를 더 쉽게 몸에 각인시킬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평소에 모든 행동과 말이 유려하지 않다. 말을 하는 도중에 다른 생각을 해 말을 더듬거나 아예 다음 할 말을 잊기도 하며 몸을 움직이던 중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맞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다고 오히려 상대에게 오해를 사 갑작스러운 갈등을 맞이하기도 한다. 극의 세계에서 대사는 이미 정해진 말이기에 중간에 끊을 수가 없다. 끊는다고 해도 그 끊는 순간은 배우들 사이의 약속으로 정해진다. 행동 역시 상호 간 약속을 통해 정해지기에 자연스럽게 보일지언정 자연스럽지는 않다. 즉, 현실 세계는 극의 세계 보다도 더 거칠어 말은 유려하지 않고 행동은 매끄럽지 않다. 이 차이로 인해 극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는 아슬아슬하지만 분명히 경계가 존재한다. 배우의 연기는 그 경계가 조금씩 희미해지되 존재하도록 하면서 극의 세계를 유지하고 동시에 관객을 극의 세계에 넘어오도록 한다. 하지만 만약 극의 세계 자체가 현실처럼 느껴진다면? 극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현실 세계와 더불어 극의 세계가 존재한다면? 두 세계가 경계 없이 양립한다면? 그 순간 무대와 현실은 경계가 없는 상태에서 겹쳐져 있을 것이다. 무대 위 인물은 배우가 아니라 인간으로 보일 것이며 관객은 불명확하면서도 명확하게 현실과 무대를 모두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두 교황>의 배우 신구 님과 정동환 님이 각각 베네딕토 16세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 그 자체가 되고 <ART>의 이순재 님, 백일섭 님, 노주현 님이 각각 마크, 이반, 세르주 그 자체가 되는 순간 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졌다. 유려해야 하는 대사는 더듬어지거나 사이가 붕 뜨면서 오히려 더 실제 말이 되었으며 실제 말과 함께 드러나는 배우의 행동은 정해진 순간에 매끄럽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상황과 사건 속에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된다. 흔들린 소리가 극의 세계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희미하게 하면서 현실 세계와 양립하게 한다. 신구 배우가 대사를 더듬는 것은 나이가 들어 순간순간이 힘겨운 베네딕토 16세가 생각이 끊기는 것이 되며 정동환 배우가 대사를 더듬는 것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하고 제안 때문에 과거의 죄가 떠올라 괴로워하는 것이 된다. 노주현 배우의 신체에 나타난 세르주의 말에 백일섭 배우의 신체에 나타난 이반이 당황한 나머지 대사를 잊고 사이가 붕 뜬 순간 "너 때문에 대사 까먹었잖어."라는 말을 했음에도 "너 때문에 무슨 말 하는지 까먹었잖어."로 들린다. 배우의 신체는 이미 채우고 있는 각자의 의식만이 아니라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된다. 두 의식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해 하나인 것처럼 합일에 도달한다. 두 인간이 공존하며 합일되는 숭고한 순간은 불명확하면서도 명확한 인지보다 빠르게 관객의 몸을 둘러싼다. 뒤늦은 인지는 숭고한 순간을 영속하게 해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떠오르는 잔상에 다시 몸을 뒤흔드는 정동을.


관객은 극의 세계를 관람하는 동안 현실 세계에 존재하되 이미 다른 현실에 존재하게 된다. 극이 끝난 이후에는 다시 원래 살고 있는 현실로 돌아오지만 그 세계는 경험한 극의 세계에 의해 끊임없이 자극을 받게 되고 흔들린다. 혹은 극이 끝난 이후에도 관객은 원래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극의 세계에 의해 달라진 현실에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극의 세계와 현실 세계가 경계가 없음에도 양립하는 것을 경험하는 순간 현실 세계는 이미 변화해 있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인 것에서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무대 위 극의 세계가 지닌 물질성은 무대를 넘어 현실로 스며든다. 극의 세계가 스며든 현실 세계는 관객에게 전혀 다르게 비춰진다. 관객은 끊임없이 자신이 느꼈던 숭고함과 그 숭고함에 대한 경이를 떠올리게 된다. 숭고함과 경이로 정동을 경험한 인간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살 수 없다. 자신이 느낀 숭고와 경이를 자신의 몸에 체현시키기 위해 새로운 자신을 추구한다. 새로운 자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지와 신체는 부조화를 겪지만 조화를 위해 서로를 조금씩 바꾸며 균형을 찾아갈 것이다. 극의 세계에서 목격한 숭고함에 관객은 조금씩 다가갈 것이다. 이따금씩 떠오르는 잔상에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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