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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an 15. 2023

서성이는 이들로 보듬어지는 삶

혜화. 나온씨어터. 네가 서성일 때.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서성이다. '한곳에 서 있지 않고 주위를 왔다 갔다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단다. 어쩌면 우리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삶에서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이제 곧 장년기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삶이지만 주인공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지 오래이다. 부딪히고 깨지는 가운데 붕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랄까. 이제는 인생에서 무너지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말 그대로 서성이며 살고 있는 듯하다. 명확한 목적지 없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 채 그저 서성이는 삶. 무엇이 목적지 없이 서성이기만 하는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일까? 단순히 살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는 목적지를 향한 의욕은 없는데... 문득 서성이고 있던 삶을 돌아보면 내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발자취가 있다. 주변의 발자취를 보고 있자니 어딘가 아프면서도 보고 싶고, 서늘하지만 따뜻한 무언가 차분하지만 정열적으로 끓어오르는 기분이다. 그렇구나. 당신이 있었구나. 서성이는 삶이 지탱되는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단촐한 무대이다. 3년 전과 비교하면 조금더 넓어지긴 했다고 해야 할까? 그 때는 탁자 하나와 양 옆의 의자가 각각 하나가 있었는데 탁자는 사라졌으되 의자는 무려 4개나 놓여있으니. 하지만 별거 없이 단조로워 보이는 이 무대에는 여러 사람이 서성이고 있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분주히 오고 가는 어느 대학의 로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이들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고속 버스 대합실. 조촐한 무대 위로 조명이 비춰지고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숨소리가 더해지는 순간 서로를 무의미하게 스쳐지나가듯 서늘하고 외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서로를 크게 신경쓰지 않은 채 자신의 발걸음을 분주히 옮기는, 서늘하고 외로운 세상의 어느 대학 로비에서 목도리를 두르고 코트를 여민 채 강사 면접을 보러 온 지연과 준기가 오랜만에 마주친다. 정확하게는 준기를 먼저 알아본 지연은 준기를 모르는 척 했지만 지연을 알아본 준기는 지연에게 "강지연 씨?"하며 아는 체를 한다. 서늘하고 외로운 로비에 서서히 온기가 채워진다.

여러 사람이 서성이고 있는 무대 위에는 오직 지연과 준기 두 사람 밖에 없지만 굳이 말하면 이 연극은 3인극이라고 해야겠다. 지연과 준기만이 아니라 두 사람의 대화로 관객들도 계속해서 떠올리게 되는, 지연과 준기의 삶에서 계속 그 둘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사람, 서민형도 이 무대 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연, 준기의 대학 동기이자 지연의 연인이며 준기의 짝사랑 상대. 아니. 복잡하게 감정이 얽히고 중첩된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동기, 연인, 짝사랑 상대라는 말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다. 관계 속에서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란 것을 깨달아버린 지연과 준기가 서성이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아마 민형과의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지연과 준기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민형과 함께 있는 상대였을 것이고 자신은 조연이면 감지덕지할 정도로 이야기 안에 있으되 바깥에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지연과 준기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서로의 관계에서 잊히지 않고 계속 함께 할 수 있게 해주는 안전망이면서도 자신을 이야기 바깥으로 밀어내는 듯한 방아쇠처럼 느껴진다.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이리 사무치게 원망스러우면서도 미치도록 그리운지.


여전히 진지하기 보다는 가볍고 쾌활한 준기와 한 때는 '깡젼'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차분하고 시니컬한 지연은 서성이던 것을 멈추고 서로를 마주한다. 재밌는 것은 2자 대면을 하고 있는 무대가 실상은 3자 대면이라는 점이다. 보이기에는 지연과 준기의 이야기만 나오는 것 같지만 그 이야기는 지연과 준기의 주변을 혹은 사이를 서성이며 함께 대면하고 있는 민형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3자 대면은 어딘가 이상하다. 겉으로 보기에 민형의 연인이었으나 연인이지 못했던 지연과 결코 민형의 연인이 될 수 없었지만 실제로는 연인이었던 준기.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지연과 정작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준기. 이러한 불균형한 상태에서 3자 대면은 자신의 이야기와 감정이면서도 민형의 이야기와 감정이기도 한 자신의 과거를 지연이 준기에게 사무치는 원망스러우면서도 미치도록 그리운 온기를 담아 전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즉, 지연은 민형과 준기에 의해 자신의 이야기에서 주연이자 조연이었으며, 지금-여기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꾼이자 민형의 이야기를 전하는 화신인 것이다. 사무치게 원망스러우면서도 미치도록 그리운 온기가 채워진다.

3인극이자 3자 대면인 2인극이자 2자 대면인 상황. 면접을 기다리는 로비에서.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은 로비의 사각지대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모의로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지연과 준기의 비어 있는 주변, 사이, 의자는 비어 있지 않다. 그곳은 민형이 서성이며 지연과 준기를 스쳐 지나가고 겹치는 공간이다. 관객은 지연과 준기의 이야기와 감정에서 민형을 엿볼 수밖에 없다. 절대 해피 엔딩일 수 없는 민형과의 연애를 막지 않은 준기를 향해 원망어린 눈빛을 보내는 지연에게서, 사랑받는 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민형을 사랑해 이별과 만남을 계속한 것에 허탈한 한숨을 쉬면서도 여전히 그리워하는 눈빛을 보이는 지연에게서 관객은 민형의 감정도 느끼게 된다. 세 사람의 관계에서 주연이면서도 조연이기도 한 지연은 이미 지연이라는 존재만이 아니라 민형이 겹쳐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준기 역시도 민형이 겹쳐진 존재이긴 마찬가지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맞잡은 손, 시계를 채워주며 스치는 피부 등 지연의 몸과 준기의 몸이 서로 교차하면서 원망, 그리움, 허탈함, 놀람, 기대 등의 감정이 오고 가면서 서성이고 있는 민형의 모습이 관객에게 선명해진다.


학부생 시절 셋이 함께 여의도에 갔다가 찍은 사진처럼. 때로는 준기를, 때로는 지연을 접어뒀을지언정 버리지 않은 사진처럼. 지연, 준기, 민형의 관계는 잠시 잊혀졌을지언정 사라지지 않았다. 그 시절의 감정은 뭉개져 눌러 담겨 있었을 뿐 씻겨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진은 잘리지 않은 채 그 시절의 관계와 감정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사진처럼 강사 면접이 끝나고 난 뒤에 끝난 것 같은 3자 대면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목적지가 어딘지 알긴 하는지. 돌아갈 집은 있는지 없는지.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는 이들로 가득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바라보는 지연과 준기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서성이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지연도, 준기도, 민형도 서성이고 있는 이들이다. 그렇게 서성이고 있는 이들에게 민형이 근처에 산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연의 말은 서성이는 것을 멈추게 하는 방아쇠이자 계속 서성일 수 있게 하는 안전망이다. 민형을 만나러 가자며 달라붙는 준기. 싫다고 하면서도 피하지만 막상 화는 못내는 지연. 둘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알 수 있다. 서성임이 끝나지 않겠지만 앞으로 조금은 더 편하게 서성이며 서로를 찾겠구나. 그렇게 삶에서 서성이고 있는 당신을 기억하며 보듬어지고 위로받으며 살겠구나.

어느 순간 삶에서 주인공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목적지를 잊어버린 채 이리저리 서성이기만 하는 삶. 먹고 사는 것이 먹고 죽기 보다 어려운 세상에서 서로 자신이 주인공이라며 아등바등하는 가운데 혼자서만 아귀다툼의 현장에 끼지도 그렇다고 멀리 도망치지도 못한 채 서성이고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목적지를 아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쩌면 모두가 목적지를 잊은 채 그저 삶을 서성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목적지없이 그저 서성이기만 하는 삶을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 걸까? 발길이 닿는 곳을 정처 없이 걸으며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네가 서성일 때>는 너무 오랫동안 지루하게 걸어야 해 허무하게 느껴지는 삶에서 그럼에도 우리가 버티며 서성일 수 이유를 알려준다. 삶에서 주연이 아니어도 괜찮다. 조연도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는 상대를 위한 안전망이거나 서로를 향한 방아쇠가 되어 접힐지언정 잘리지는 않은 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선가 서성이고 있을 당신을 기억하며, 인생의 어느 순간에 남아 있는 당신의 발자취를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언제고 다시 만나 그 시절의 발자취에 아직 남아 있는 감정을 나누며 서로를 보듬어주고 위로를 받겠다. 모두가 서성이는 세계에서 당신이 있기에 내 삶은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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