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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Jan 27. 2023

사랑으로 비약하는 몸의 종말

이수 아트나인& 광화문 씨네큐브. 본즈앤올.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감정 중 하나로서 실체이지만 몸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반쪽짜리 실체이다. 사랑을 있는 그대로 놓아둔다면 그저 휘발될 뿐이다. 휘발되는 사랑을 연료이자 발화제로서 몸을 태워야 한다. 일렁이는 사랑이라는 불씨를 몸을 통해 때로는 간절히, 때로는 정열적으로 발화해야 한다. 가져달라고. 가지겠다고. 오직 당신만이 내가 될 수 있으며 나만이 당신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의 환상에 몸과 마음이 완연히 기울어진 상태. 자신의 존재 유지가 중요한 인간에게 다른 누군가에게 완연히 몸과 마음이 일치한 채 기울어지는 사랑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것이기에 아름답다. 자신의 감정과 몸이 일치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과 몸이 함께 일치하여 함께 타오르는 숭고한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간과 사랑 모두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허용되는 경우와 억압당하는 경우가 있다. 아름다움을 억압당한 존재와 그들 사이의 사랑은 언제나 죄악으로 치부되어 언제 종언을 맞을지 알 수 없다는 불안 속에서 끝없이 좌절된다. 자신들의 존재와 사랑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억압당한 이들은 서로의 존재에 의지해 불안과 좌절을 온 몸으로 견디며 유예되는 아름다움이 다가올 날을 기다린다. 언제 다가올지 알 수 없어 준비되지 않은 채 맞이한 아름다운 순간은 서로가 일치하는 순간이나 함께 존재할 수 없는 미결의 순간이다. "뼈까지 전부(bones & all)". 말 그대로 남김없이 상대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기에 아름다움을 억압당한 이들의 사랑도 현실화된다.

출처. 왓챠피디아

1. 불안과 고통의 잔상과 거리를 두고도 이입하는 관객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본즈 앤 올>은 제목에서부터 식인(食人)을 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이터(Eater)들을 통해 현실에서 잊히고 억압당한 이들의 사랑을 현실화하고 다시 한 번 정상 사랑의 경계를 흐릿하게 한다. 경계를 뒤흔드는 영화는 시작부터 남다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손가락을 뜯어먹는다. 한 쪽은 너무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듯 손가락의 살을 뜯어먹고 다른 쪽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친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가운데 상대의 손가락을 애무하듯 입으로 가져가는 듯한 섹슈얼한 장면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무엇이 잘못된 지 모르는 와중에 무언가 분명히 잘못됐다는 것이 분명하게 인지되는 공포스러운 장면이 된다. 매런(테일러 러셀 분)의 입에서 선연한 붉은 빛으로 끈적하게 타고 흐르는 피만이 관객에게 방금의 장면을 제대로 봤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한다.


단언컨대 2022년 봤던 영화 중 가장 충격적인 시작이다. 손가락을 뜯어 먹었을 뿐만 아니라 이터라는 존재의 외형은 영화의 시작에서 받은 충격을 그대로 이어간다. 내장을 드러낸 채 여기저기가 찢기고 뭉개진 살과 초점 없이 회색 동공을 띄고 있는 시체의 형상이 아니다. 인간의 살을 뜯어 먹고 입가에 흐르는 피를 맛있다는 듯 혀로 햝는 이터의 모습은 시체가 아니라 인간인 그 무엇이다. 인간과 구분이 안 되는 식인괴. 그들의 존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애무하듯 입으로 가져간 손이 뜯어졌던 지나간 장면의 잔상과 함께 관객에게 섬뜩한 불안감을 남긴다. 서로에게 다가가 몸을 만지고 키스를 위해 입술과 혀를 맞대는 행위는 더이상 로맨스를 위한 장면이 아니다. 언제 살이 찢기며 피가 분수처럼 튀어오를지 알 수 없는 섬찟한 고통을 영화를 보는 내내 손과 발끝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온 몸으로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재밌는 것은 식인이라는 행위를 통해 영화는 매런만이 아니라 관객마저도 저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이하, 콜바넴)으로 유명하다. 티모시 살라메라는 배우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영화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어 하트의 형상을 그린 매런과 리(티모시 살라메 분)가 보이는 <본즈 앤 올>의 포스터는 관객에게 두 사람의 로맨스를 기대하게 한다. 난데없이 피와 살에 도취되어 눈을 멍하니 뜨고 있는 식인괴를 마주하는 관객은 단순히 기대가 내동댕이 쳐진 것이 아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몸 주변에 도사린 채 순간순간 다가오는 식인과 파편화에 대한 불안과 고통으로 매런과 리처럼 존재와 사랑에 대한 아름다움을 억압당한 이들과 비슷한 상황으로 내동댕이 쳐진다.

출처. 왓챠피디아

애무를 위해 입에 가져간 줄 알았다가 뜯겨지는 손가락, 투두둑 떨어지는 피의 소리, 당황과 경악을 넘어 공포와 고통으로 가득찬 여학생들의 비명,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손가락을 뜯어먹는 매런. 이 모든 요소들은 스크린을 넘어 관객의 몸 구석구석에 섬뜩한 불안과 섬찟한 고통을 잔상처럼 남겨놓는다. 매런이 설리(마크 라이언스 분)와 함께 막 죽은 노인의 시체를 정신없이 파먹는 순간. 리가 놀이공원에서 만난 유부남과 사랑을 나누던 도중 목을 그어버리는 순간. 관객은 식인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든 첫 장면의 잔상을 경유해 살을 발라먹는 소리, 피가 떨어지는 소리, 달빛도 거의 없는 어두운 밤 등의 요소를 통해 식인에 시각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감각의 순간마다 매런과 리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와중에도 이입이 깨지게 된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말할 수 없고 자기 이외에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고독과 불안을 느끼는 이터로서 매런과 리의 모습은 그들의 식인을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해도 감성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한다. 함께 미국의 거대한 자연을 횡단하는 두 어린 이터의 모습은 세상에 이해받지 못한 채 떠도는, 억압당한 이들이자 현실에서 삶에 대한 어떠한 확신도, 미래도 그리지 못한 채 떠도는 젊은 관객들의 형상이기도 하다. 자신의 존재와 존재에 대한 사랑에 계속해서 불안과 의심에서 섬뜩한 불안과 섬찟한 고통을 공통되게 느끼기에 관객은 매런과 리에게 온전히 다가갈 수는 없으나 동시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 관객은 식인으로 인한 불안과 고통의 잔상으로 스크린에서 멀어지고 싶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매런과 리가 느끼는 불안과 고통을 공감하기에 스크린에 붙들린 채 매런과 리의 사랑이 유예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과정을 몸으로 경험하며 종말과 비약의 순간을 기다린다.

출처. 왓챠피디아

2. 식인의 비약으로 도달하는 사랑

이쯤에서 잠시 식인 즉, 먹는다는 행위를 살펴보자. 식인 행위는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행위라고 말하는 리, 자신이 먹은 이의 머리를 모으는 설리에게서 알 수 있듯 먹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대상을 소유하는 행위이다. 이는 사랑과도 유사하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은 일정 부부 상대에 대한 소유욕을 느끼는 것과 같다. 오직 자신과 상대가 관계를 맺을 때에만 사랑은 유지된다. 나아가 대상에 대한 소유욕에 근거한 먹는 행위와 사랑은 소유라는 측면에서 일치와 연결된다. 소유는 주체에게 대상을 속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속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일치를 목표로 한다. 주체가 자신에게 속한 대상을 자신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다만 먹는 행위는 물리적으로 속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 정신적으로 자신에게 깃들게 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정신적으로 속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 물리적으로 자신에게 깃들게 하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본즈 앤 올>의 식인은 이터에게 생존을 위해 필요한 행위이다. 설리에게 식인은 동족과 인간을 함부로 살해하지 않는 선상에서 자신을 유지하면서도 타인을 소유할 수 있는 행위이다. 리는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첫번째 의식적인 식인을 한 이래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이다. 두 인물은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식인을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소유 행위로 인정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매런에게 식인은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행동임에도 자신이 부모로부터 버림 받는 이유이자 어느 한 가족을 지옥으로 떨꾸는 행위이다. 매런은 식인을 통해 존재를 유지할 수 있으나 식인으로 사회만이 아니라 가족과도 격리된 와중에 타인마저도 세계에서 완전히 유리시킬 수 있는 괴물이다. 즉, 매런에게 식인은 자신을 세계에서 말 그대로 독자(獨自)로 만들어 괴롭히는 모순된 행위이다. 그렇기에 매런은 대상이 자신과 비슷하게 독자인 경우에만 식인을 하려고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애초에 상대가 식인을 할 수 있는 이터라는 점에서 세 인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치명적인 포식자이다. 상대를 마주보는 장면들은 지속적으로 불안과 고통의 잔상을 자극해 관객을 가만히 있기 어렵게 한다. 이처럼 언제 어떻게 피와 살이 난무할지 모르는 긴장감은 반대로 식인괴임에도 서로를 향한 단 한 번의 끌림 즉, 사랑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그리워하는 매런과 리의 관계에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서로를 사랑하기에 결코 상대를 먹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불안과 고통의 잔상을 기반으로 강화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매런을 만난 이후로 계속해서 매런을 쫓아오는 설리의 존재 역시 매런과 리의 관계에 대한 관객의 이입을 더욱 끈끈하게 만든다. 식인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매런과 리와 달리 설리는 이미 죄책감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식인을 지속하며 소유욕을 즐기고 있다. 그런 설리의 모습은 매런과 리의 관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빌런으로 작용한다.


매런과 리의 관계에 관객이 완전히 안심할 수 있게 되는 장면은 리를 찾아온 매런의 장면이다. 엄마가 자신을 버린 이유가 이터로서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매런은 식인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결국 식인을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엄마를 용서해야 한다 하는 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어 리에게서 도망친다. 이후 왜 매런이 다시 리를 찾아오는지 영화는 어떠한 이성적인 서사 장치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매런이 리를 찾아왔을 뿐이다. 리가 미치도록 그리웠을 뿐이다. 그가 보고 싶었고 안고 싶었으며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이다. 서로 어떠한 대화도 없이 "리!"라 부르고 그저 격하게 포옹한다. 관객은 매런과 리의 관계를 보며 더이상 불안과 고통의 잔상을 보지 않는다. 독자인 서로를 독자가 아니게 하는 둘의 관계에서 관객은 사랑을 느낄 뿐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아직 종말과 비약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매런과 리의 관계에서 평안을 느끼는 관객은 매런과의 관계에서 감정적인 비약으로 자신의 철칙을 어긴 설리를 마주한다. 애초부터 과도한 소유욕을 보이는 설리에게 사랑은 사실 불가능하다. 일정 부분 소유욕과 관련이 있는 사랑은 위계가 없는 존재 간 관계이기에 소유에만 국한해서는 유지될 수 없다. 그렇기에 매런에게 모욕을 당했다 생각해 임종을 앞둔 노인이 죽은 뒤에야 식인을 한다는 자신의 철칙을 어기고 리의 여동생 케일라(안나 코브 분)을 살해해 식인을 한 설리는 어떤 존재도 가까이 갈 수 없는 블랙홀에 불과하다.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완전한 독자가 된 설리는 재앙 그 자체일 뿐이다. 이제 재앙을 맞아야 할 시간이다.


거실 소파에서 마주 보고 누워 책을 읽고, 포옹한 채 요리를 하고, 케일라와 안부를 묻는 전화를 주고 받고. 어두운 영화관 내에서 영화가 끝나는 시간을 알 수 없는 관객에게 아무도 모르는 마을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매런과 리의 모습은 이대로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모든 존재를 소유하기만 하는 설리의 등장은 관객에게도 매런과 리에게도 예기치 못한 파괴적 재앙이다. 차분하게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듯한 매런과 리의 사랑은 설리를 죽이는 과정에서 리가 칼에 맞으며 한순간에 다시 낙하를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이 비극에서 매런과 리의 사랑은 비약을 맞이한다.


피웅덩이에서 죽어가는 자신을 안고 있는 매런에게 뼈까지 남김없이 온전히 먹어달라는 리.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식인을 했던 리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소유해달라는 비약의 말이다. 식인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임에도 도덕적으로 스스로를 자책한 매런의 입장에서 리의 말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아무런 자책없이 식인을 해 상대를 소유하는 비약의 행위이다. 설리가 자신의 철칙을 어기고 홀로 존재해야 하는 소유욕의 블랙홀이 되었다면 매런과 리는 서로가 서로의 철칙을 대신해주는 일치의 아름다움에 도달한다. 낙하 에너지는 거꾸로 비약 에너지로 바뀌어 둘은 함께 존재할 수 없으나 함께 존재하고 있는 미결의 순간을 맞이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영화의 마지막에서 보랏빛이 물들어 보이는 드넓은 미국의 들판에 매런과 리는 기대어 있다. 함께 존재할 수 없으되 함께 존재하고 있는 이들은 들판의 한가운데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들판에서 함께 저 멀리 있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기대어 있는 매런과 리의 모습은 들판에 원래부터 있던 자연물 같다. 문명 사회라는 현실에서 가족과 사회로부터 완전히 잊히고 억압된 채 살아오던 두 사람은 이미 세계 그 자체에서는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왜 그 둘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왜 그 둘이 서로에게 온전히 몰입했는지 알 수 없다. 호르몬의 영향이라는 과학적 말 조차도 왜 하필 서로에게 호르몬이 반응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그런 것이다. 그 누구라도 너무나 당연하게 몸과 감정의 비약을 통해 느끼는 것이기에 필연이나 운명이라는 단어마저도 사랑 앞에서는 조야하다. '나'는 '너'를 향한 감정에 따라 바라보고 만지고 안는다. 서로를 향한 감정과 몸을 온전히 바치며 완전히 일치에 도달한다. 비록 그 순간 '나'와 '너'는 함께 존재하되 존재하지 못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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