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염살, 도화살이 있으면 생기는 일
점을 보러 자주 가진 않지만 '어디 누가 점을 엄청 잘 본다더라'는 소리를 들으면 솔깃해서 호기심에 몇 번 철학관이나 점집에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항상 같은 레퍼토리로 듣는 말이 있다.
"얼굴 관상에 도화가 있으세요."
"사주에 홍염살이 있으세요."
도화살은 무엇인지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으나 홍염살은 처음 들어본다. 그게 뭐냐고 묻자,
"옛날로 치면 기생 사주라고 하죠."
"네?"
기생 사주????
"아.. 기분 나쁠 필요는 없어요! 요즘으로 치면.. 그래.. '연예인'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사주예요. 재주가 많다는 거라 그런 쪽으로 나가면 성공할 사주로 여겨져서 최근에는 좋은 살로 여겨지고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기생 사주라니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인터넷에 홍염을 검색해보았다.
홍염紅艶
신살의 하나이다. 외모가 화려하고 풍류를 즐긴다. 홍염은 함지에 닮은 신으로 특히 여자 사주에서 이 신살이 있으면 다정다감하며 주색을 좋아하고 희희낙락하는 풍류인이다. 홍염은 남몰래 밀통하여 사생아를 낳는 일이 있다고 하는 신살이다.
출처:네이버 지식 백과
........ 기분이 거지 같다.
이런 살들이 진짜 나한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인생의 몇 가지 관련 에피소드가 있다.
일문학과지만 일본어 회화를 공부하는 건 전공 수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따로 공부를 해야만 했다. 학교에서 하는 스터디로는 성이 차질 않아서 별도로 학원 출신의 선생님이 운영하는 소수 정예 일본어 스터디에 가입을 해서 매일 학교를 마치고 수업을 들었다. 경산에 학교가 있는 데 스터디 모임은 대구 북구 쪽에 있어서 우리 학교에서 버스를 타면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수업까지 다 듣고 마치면 거의 9시가 훌쩍 지나있다. 그날도 수업을 듣고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가 바로 집 앞까지 오는 것이 없어서 한 정거장 정도는 걸어야만 했다. 한 손에는 두꺼운 전공 서적 세 권과 파일을 들고 이어폰으로 에이브릴 라빈의 Sk8er Boi를 틀어놓고 흥얼거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날은 브이 라인이 넓게 들어가 쇄골이 드러나는 성근 느낌의 흰 니트에 회색의 플레어 미니 스커트를 입고 베이지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딱 요즘처럼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중이라 한 정거장 정도 산책하듯이 집으로 걸어가는 게 꽤나 마음에 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분홍빛 치크로 터치한 볼을 스치고 어깨를 넘는 긴 생머리를 스쳐서 가면 잠시 멈춰서 바람 냄새도 맡아보았다. '가을 냄새난다.' 에이브릴 라빈의 방방 띄우는 팝송보다 잔잔한 발라드로 바꿔서 듣고 싶어 걷는 걸음을 멈춰 노래 플레이 리스트를 열려고 했다. 그때, 눈앞에 어떤 남자가, 밀착돼서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빨간 나시 원피스를 입고 술집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어떤 언니를 툭툭 치면서 장난을 걸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언니는 버러지라도 보듯이 미간을 찡그리고 그 사람 쪽으로 저리로 꺼져라고 손을 휘익 휘익 까닥 대고 있다.
'이상한 사람이 다 있네. 빨리 지나가자.'
이어폰을 급하게 다시 귀에 꽂고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지나가면서 행여나 그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고개를 푹 숙였다. 번화한 큰 도로 가라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심장이 두근두근 터질 거 같고 싸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런 느낌은 언제나 맞을까.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도로가 옆에 불법으로 주차된 트럭의 사이드 거울을 살짝 보니 그 남자가 실실 웃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심장이 더욱 가파르게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다리는 바닥에 얼어붙어버린 것 같이 느껴졌다. 남색의 헤진 추리닝을 입고 머리는 헝클어져 언제 감았는지도 모르겠을 정도로 비듬이 듬성듬성 보이는, 술집 언니에게 집적대는 그 남자가 나를 따라온다.
'아니야. 그냥 가는 방향이 우연히 같은 거일 거야. 나 따라오는 거 아니겠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급히 건너니 그도 따라서 건넌다. 중간쯤 갔을 때 확 방향을 바꿔서 다시 예전 길로 돌아서 뛰어갔다. 그가 당황하면서 따라서 뛰어온다.
'미쳤다. 이 새끼 진짜 나 따라오는 거였어.'
눈앞에 선술집 '투다리'가 보여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뛰어서 들어갔다.
꼬치를 굽고 있던 사장님이 보면서 '어서 오세요' 한다. 순간 두 손에 힘이 풀려 벌벌 떨면서 전공 서적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아저.. 아저씨!! 밖에 이상한 사람이 쫓.. 쫓아와요!!"
사장님이 놀라 달려 나와 괜찮냐고 물어본다.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고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 나를 한번 보더니 문 밖으로 나가신다. 사장님이 열고 있는 문 뒤에서 얼핏 보니 그 새끼가 능글맞게 실실 웃으면서 나를 한번 보고는 천천히 돌아서 걸어간다.
사장님이 유리컵에 물을 담아서 이거 마시고 진정하라 하신다. 그때.
"혜미 아니가? 니 와카는 데?"
마침 안쪽에서 친구가 아르바이트하는 '해리피아'의 남자 아르바이트생 세 명이 술을 먹고 있었다. 내가 친구를 보러 자주 가서 그들과도 몇 번 본 적이 있어 기억을 하는 모양이다. 떨어져 있는 책들을 대신 주워주고 나를 데리고 그들의 테이블로 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이들이 욕을 하며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그 변태 새끼는 없다. 친구한테 대신 전화를 걸어주고 한 정거장도 안 되는 거리를 택시를 태워 보내주었다. 택시를 내리는 데 친구가 마중을 나와있다. 친구를 보자마자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녀가 말한다.
"혜미야.. 또 이상한 새끼가 따라왔어?"
그렇다. 이번 한 번이 다가 아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내리면 같이 따라 내렸는지 언제부터 따라왔는지 모르는 남자가 어깨를 툭툭 치며 전화번호를 물어본다.
학원을 가서 수업을 들었을 때 항상 앞 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는데 매일 내 앞에 앉아있던 남자아이가 어느 날 뒤돌아 보면서, 혼자 수업 듣는 거 같은데 나랑 같이 점심도 먹고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한다.
수업을 들으면서 강사 선생님께 모르는 게 있어 물어보러 가니, 수업도 항상 열심히 듣는 모습이 너무 이쁘다며 한번 안아보자 한다.
회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종종 마주치던 같은 동네에 사는 듯한 남자가 자주 나를 봤다며 두 번이나 번호를 물어본다. 자기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며. 정중히 거절하고 우리 집을 혹시 그가 알게 될까 무서워 집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다른 데에 들리곤 했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니 어떤 남자가 옆에 빈자리에 앉아 내 테이블을 똑똑 친다. 에어 팟을 빼고 쳐다보니 차를 한잔 사주고 싶다 한다. 왜요. 하니 그러고 싶단다. 전화번호를 물어본다. 죄송해요, 저 남자 친구 있어요. 쏜살같이 도망친다.
마스크를 쓰는 요즘, 정말 이런 일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마스크를 끼고 동네 파리바게트 앞에서 오기로 한 아는 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데, 어떤 남자가 와서 '누구 기다리시는 거예요?' 하길래 잘 알아듣지 못하고 '네?' 하니 '너무 제 스타일이라 그런데 번호 좀 주실 수 있나요?' 한다. 그는 턱스크를 끼고 있다. 죄송합니다. 싫어요.
나는 모르는 데 누군가 나를 지긋이 보고 있다.
내가 가지고 싶어서 가진 살도 아닌 이 살이!!! 가끔은 내 인생을 피곤하게 만든다.
지금은 필요에 의해 퍼스널 브랜딩하고 있는 SNS 역시 서른 넘게 기피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마음을 바꿔 먹었다.
타고났다며.
그럼 이용해보자 홍염살이란 너란 녀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