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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나은 Aug 21. 2021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난다.

한번 그냥 써 본 첫사랑 이야기

  내일 서울 출장이 예정이 되어 KTX 역 가까이 사는 친구네서 하루 묵기로 했다. 새벽 기차를 타야 해 역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 우리 집보다는 그곳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허당끼 다분한 내가 잘 챙겨서 나왔는지 문득 걱정이 스쳐 옆에 놓인 짐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진회색의 노트북 가방, 갈아입을 옷가지가 담긴 위켄드 백, 친구네서 먹으려고 집에서 챙겨 온 스콘, 그리고 택시의 뻐등한 바랜 가죽 시트와 같은 색깔의 내가 좋아하는 털 파우치 가방. 털로 만들어진 이 파우치는 보드라운 몰티즈 털을 쓰다듬는 감촉이 들어 내가 아주 좋아하는 가방인데 택시 좌석에 놓여 있으니 흔히들 하나씩 구비해놓는 차량용 쿠션이랑 다를 바 없어 속으로 킥킥 댔다. 털이 뭉쳐진 몇 군데를 달래서 가라앉히며 지이익 지퍼를 열고 핸드폰을 쓰윽 꺼내 전화 버튼을 눌렀다.

  "서연아, 지금 너희 집 쪽으로 택시 타고 가고 있는데 10분 뒤에 도착해."

  서연이는 20년 지기 절친으로 이십 대 초반에 일찍 독립해서 혼자 산지 거진 10년이 다되어 가는 프로 자취러다. 몇 달 전,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역 근처에 방을 얻어 살고 있다. 나는 아지트가 생긴 마냥 신나서 매일 출근 도장 찍다시피 그녀의 집에 들락날락거리고 있다.

 '좋겠다.'

 혼자 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내가 독립을 하는 건 결혼할 때나 가능하다는 부모님의 고집에 설득이 만만치가 않다. 다음에는 어떤 말로 살살 부모님을 꼬실까.

"도착했습니다. 손님. 만 삼천 원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나왔네. 허둥지둥 파우치에서 버건디 프라다 장지갑을 꺼내 카드만 기사님께 내밀고 지퍼도 잠그지 않은 채 지갑은 다시 파우치에 밀어 넣었다. 챙겨야 할 짐이 많아 양손에 덜겅덜겅, 어깨에 내 몸집의 두배는 될법한 탱크 노트북이 든 가방을 메고 택시에서 내렸다. 원룸이 골목에 위치한 관계로 정차한 택시 뒤에 줄줄이 딸려있는 다른 차들 때문에 급히 차문을 닫았다. 왠지 차 안에서 내 욕을 할거 같다.

 띠띠띠띠. 입구 비밀 번호 패드판이 특정 번호만 숫자가 흐리고 까져 있어 조합하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겠다고 매번 올 때마다 생각하면서도 방에 들어서는 순간 서연이에게 말하는 걸 잊어버린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어먹을 건물의 계단을 낑낑 대며 사층까지 올랐다.

 후욱 후욱 숨을 골라 겨우 집 앞에 도착해 다시 키패드판을 누르고 들어갔다.

"나 왔다~~."

"왔어? 나 샤워 중!"

 탱크 노트북을 바닥에 내팽겨 치고 싶지만 내 밥줄이므로 살포시 거실 바닥에 내려놓고 옷가지만 들었는 위켄드 백을 대신 신경질 나듯 멀리 내팽겨 쳤다. 가지고 온 스콘은 하얀 대리석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뭔가 허전한데...?'

 ...............................몰티즈 털 파우치 가방이 없다!

 위켄드 백을 열어 안에 넣었는지 노트북 가방 안에 넣었는지 탈탈 털어 보았지만 어느 곳에도 몰티즈는 없다.

 "왜 그래? 뭐 없어졌어?"

  젖은 머리카락을 타올로 어루만지며 나온 서연이가 눈을 댕그랗게 하고 물어본다.

"나... 택시 안에 지갑까지 다 들어있는 파우치 두고 내린 거 같아."

"뭐어? 헐...어떡하냐. 택시 결제 뭐로 했어?"

"카드로 했는 데 모르고 영수증을 안 받았어."

"핸드폰, 핸드폰은?"

"그건 다행히 손에 들고 내렸어."

"일단 지갑에 들어있는 카드들 정지시키고 결제 내역 확인해서 택시 회사 찾아내자. 그리고 경찰에 분실 신고도 하고. 습득되면 연락 올 수 도 있으니까."

 울상이 되어 있는 나를 보며 똑순이 서연이가 착착해야 할 일을 지시한다. 그동안 핸드폰만 두 번. 지갑은 한 번. 잃어버렸다. 매번 어떻게든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왠지 불안하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는 버스 정류장에 그날 샀던 탐스 신발이 든 종이 가방을 벤치에 두고 버스를 탄 적도 있지.

 그녀가 지시한 대로 하나씩 클리어하고 있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경찰입니다."

 문을 열고 경찰에게 분실하게 된 경위와 장소, 인적 사항을 전달하고 의미 없는 질문을 했다.

"찾을 수 있을까요?"

"분실 신고해 두었으니 습득이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만.."

 말 끝을 흐리는 경찰관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내려놓고 액땜했다고 생각해."

서연이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속으로 돌아오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실낱같은 희망을 빌었다.

아... 법인 카드. 내일 출장인데 진짜 돌겠네.

  


 딩딩딩디 딩딩딩디 딩딩딩디.

 새벽 즈음에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충전 중이던 핸드폰을 확인하러 가다 바닥에 발이 미끄러져 침대 모서리에 엄지발가락을 요란하게 찧었다. 평소 욕을 하지 않는 나도 이건 욕 좀 해야겠다.

'와 씨..발'

 전화가 끊길까 봐 화면을 확인하는 데 어두운 방에 확 불빛이 퍼져 이내 환해진다. 창문 너머 어슴푸레 날이 샐 무렵에 비치는 진홍이 섞인 노오란 노을이 올라오는 걸 보니 곧 해가 뜨겠다.

"05x-xxx-xxxx"

 지역 번호가 뜨는 일반 전화번호다.

"여보세요."

"혜미야. 여기 xx 경찰서인데.. 너 가방 잃어버렸어.?"

"......................"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절대 잊지 못할 목소리. 준영이다.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힌다는 말을 들으면 코웃음 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는 데 말문이 막혔다.

"혜미야. 나 준영인데.. 내가 있는 경찰서에 네가 잃어버린 가방이 분실물로 들어왔어. 택시 기사분이 운행 마치고 뒷좌석 정리하는 데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셨대. 다행히 바닥 가죽 색깔이랑 가방 색이 비슷해서 다른 손님이 못 봤나 보다 하시더라. 네 명함이 안에 있어서 바로 전화했어."

 스무 살 겨울, 나를 가장 아프게 버렸던 내 첫사랑이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닿았다. 사실 준영이와 사귄 기간은 백일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와의 인연은 그 이후로도 십여 년 동안 이어져 왔다. 잊을만하면 연락이 왔다. 그래도 지난 몇 년간은 잊고 살고 있었는데 또 이런 식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줄이야.

 그와 나는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관계라기보다는 질긴 인연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훨씬  설명해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내가 그를 차단하고 나서야 우리는 끝이 났으니 말이다.  글은 허구라고 하고 처음에 덮을려고 했던 소설보다  소설 같은 한번 끄적여본, 내 첫사랑 글의 시작이 되는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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