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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나은 Aug 22. 2021

나의 사라진 케렌시아

처음으로 독립을 했다.

   해가 뉘엿이 넘어가기 직전, 그러니까 세시에서 네시 그즈음 내 공간에 햇살이 스며들어 더 들어올 것도 없이 꽉 차는 이 느낌이 좋아 처음 방을 보자마자 그날 계약을 했다.  서른 넘게 나만의 공간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는 터라 비록 내 것이 아닌 집이지만 당분간은 내 것일 이 오피스텔을 아꼈다.

  부동산 계약서를 손에 들었던  벅찬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정말 내가 이제는 독립이란  하는구나. 실감이  나서  번이고 종이 계약서를 들여다보는 바람에 가장자리가 반질반질 닳을까 고이 파일에 넣어 보관했다. 예정된 이삿날이 오기 전까지 회사 서랍에 모셔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어 보았다.



 주방과 거실이 일체형인 큰 원룸 방과 그것의 반 사이즈 정도 되는 방이 있는 투룸 구조였다.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편에 욕실과 화장실이 있었고, 샤워 부스가 따로 커다랗게 있어 꽤나 큰 평수를 차지했다. 오랫동안 씻는 걸 좋아하다 보니 욕실이 큼직한 건 마음에 쏘옥 들었는데 단 하나 욕실 문의 모양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테리어를 위해서라면 하지 않았는 게 더 좋았을 달팽이 모양으로 둥글게 검은 동그라미 몇 개가 있다. 차라리 아무 모양이 없는 화이트였더라면. 완벽한 이 집에 유일하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다.

 옷을 좋아하는 나는   방에  헹거를 두고 드레스룸을 만들기로 하고 주방과 연결된 거실에 침대를 들여놓았다. 옷에 음식 냄새가 배는  마음에 들지 않아 여닫이 문이 달려 있는 작은 방을 기꺼이 옷에게 내어주었다.


  이사한 첫날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이게 꿈인가 싶어 몇 번이고 볼을 꼬집었다. 새하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흐흐 대며 실없이 웃었다. 바스락 거리는 이불의 느낌이 좋아 일부러 다리 사이에 이불을 넣고 비벼보았다. 침대 옆에 놔둔 은은하게 퍼지는 베이지 색감의 삼각 조명도 몇 번 두들겨 보았다. 달칵달칵. 아무래도 잠이 올 거 같지 않아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을 트니 손흥민이 축구를 한다. 축구에는 맥주라며 빌트인 냉장고 문을 덜컹 열고 한 캔을 꺼내 휴지로 입구를 스윽 한번 닦아 '푸슈욱' 고리를 잡아당기자 보골보골 거품이 나더니 살짝 코에 튀었다. 휴지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손으로 스윽 코언저리를 훔치고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여기가 바로 내가 있어도 되는 곳이다.

 


 사무실에서 거의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전화나 메일 업무가 많아 정말 어느 날은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않은 날들이 있다. 또 다른 어느 날은 전화 업무도 거의 없다. 말을 하도 안 하다 보면 목이 가라앉아 마른침이 목 안에서 돈다. 예전에는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이 계셔서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라도 했는 데 혼자 사니까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타인과 말 한마디도 안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진짜 다른 이랑 말 한마디도 안 하고 하루를 버텨봐?라는 별난 도전 욕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내 포기했다. 사람이 그립더라.

 그런 날은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근처 단골 카페로 가서 달달한 디저트와 에이드를 시켜 놓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안부를 묻고 시시콜콜한 수다를 한 시간 정도 떨었다. 그럼에도 그리워하는 감정이 채워지지 않고 사람이 더욱 고파졌다. 집으로 친구를 한 번도 초대한 적이 없어 전화기 건너편으로 툭 던져서 물어본다. 저녁 같이 먹으러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말을 하는 도중에 '우리 집'이라는 단어가 너무 좋아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맞다. 나도 이제 친구를 언제든지 마음대로 초대할 우리 집이 있다.

응, 갈게!

 즉흥적으로 만나는 것도 좋아하는 나는 신이 나서 뭐 먹고 싶어? 내가 만들어 줄게. 아니다. 우리 부모님 요리 잘하는 거 알지? 집에서 받아온 반찬도 엄청 많아. 그거 예쁘게 차려서 먹자.

콧노래로 있지도 않은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친구가 오기 전에 방을 한번 닦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만 카페를 나섰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 그곳에서 더 이상 살지 않지만 쫓기어 달아나, 집을 나오던 마지막 날, 그렇게도 서럽게 울었다. 처음에 들어갈 때와 그곳을 나올 때의 나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고 소중한 나만의 케렌시아는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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