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있는 게 아니다는 말이다.
키보드 옆에 충전 중이었던 휴대폰이 울린다. 나는 벨소리로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소리가 나고 있다. 모르겠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내 휴대폰은 대개 진동이다. 오늘처럼 벨소리가 잘못 설정되어서 울리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얼른 다시 진동으로 바꾼다. 일본에서 유학했을 때 일본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직접 보고 겪었던 경험이 유독 이것에만 적용이 되는 거 같기도 하다.
무음으로 돌리는 데 여전히 울리고 있다. 휴대폰을 들고 사무실 밖 복도로 나갔다. 모르는 지역 번호다.
머뭇머뭇 전화가 괜스레 받기 싫더라. 아니나 다를까 결국은 정말 받기 싫은 내용의 전화였다. 분명 오늘 자기 전까지 귀에 맴돌고 불면증까지 유발할 환장할 노릇의 내용이라 가슴을 쳤다. 괜히 받았나 싶었다.
차라리 받지 말걸.
전화를 끊고 손에 휴대폰을 든 채 사무실로 느른하게 걸어 들어가는 데 속절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만히 서서 저 멀리 복도 끝의 창을 멍하니 바라보며 불현듯 들었던 어떤 생각을 끄집어내어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했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초반에 계속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글감이 꽤 많지. 내가 에세이를 쓰면 재미있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남들과 약간은 다른 삶을 살고 있고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최근에 어떤 작가분은 이런 생각을 하신다고 했다.
내가 쓰는 에세이를 누가 읽지? 이게 과연 재밌는가?
정말 완벽하게도 정반대로 에세이를 바라보는 이 분의 시선이 흥미로워 왜 내가 에세이를 쓰려고 마음을 먹은 건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나는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굉장히 궁금한 사람 중의 하나로 이는 내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온 지 꽤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에세이를 읽으면 그 사람의 삶을 훔쳐볼 수 있고, 어떤 일에 대한 타인이 바라보는 시선을 알 수 도 있어 좋아한다. 다른 이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이렇게 살아가고 이런 일이 있으면 이렇게 대처를 하고 이런 감정을 느끼며 이런 사랑을 하고 이런 슬픔을 겪는구나 하고. 그 속에서 때로는 같이 울고 웃으며 내 상황에 바꾸어 넣어서 어떤 문제를 풀어보기도 한다.
어제 다녀온 즉흥적인 부산 여행에서 만난 동생과 밤새도록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그 동생을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전달되어 오는 타인의 인생을 담담히 귀 기울이다 보니 내가 처음에 하고 있던 저 생각이 떠올랐다. 참으로 볼이 붉어질 정도로 기가 막히게 우스운 생각이었다.
그간 내가 만나왔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만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보다 더 절절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누구나에게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내가 겪은 일이 가장 유별스러운 것이라고 느꼈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상황을 겪는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측은하고 이 세상에서 지금 나보다 불행한 사람을 없을 거라고 나를 향해 삿대질했다. 하지만 글에 기대어 쓰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내 삶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마음 치료를 할 때 자주 사용하는 자아를 분리해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글을 통해 어느 순간 그렇게 '나'를 보게 되었다. 내 안에서만 가지고 있던 흐릿했던 감정들이 형체화가 되어 쏟아져 나오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 순간의 나로 되돌아가 나의 마음을 안아주는 경험을 반복했다. 혀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과 손을 통해서 쓰이는 것이 나에게만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순간, 내가 나를 비로소 올곧게 마주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방금 전에 온 불쾌한 전화를 흘려보냈다. 나의 하루가 그깟 전화 한 통으로 불쾌해질 필요가 없으니까.
앞으로도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으며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고 안아주는 글을.
내가 누군가의 에세이를 읽고 공감하였듯이 누군가는 나의 것을 읽고 같이 기대어 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