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나은 Oct 22. 2021

오래오래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우리 엄마

 늦저녁을 먹고 치운 뒤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는데 너머로 엄마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쇼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물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지 몇 번이나 뒤돌아서 텔레비전을 본다.

 "엄마, 내가 설거지할게. 소파에 앉아서 봐."

 "아이고 됐어. 이거 뭐 몇 개나 있다고."

  그러면서 두어 번 더 뒤를 곁눈질하며 쳐다본다. 보다 못한 내가 일어나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자,

 "됐어. 다했어 다했어."

  하시면서 서둘러 그릇을 정리한다. 왜 우리 엄마는 항상 됐다고만 할까.




  엄마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에 결혼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가장 젊을 때는 온 동네 아주머니들이 다하고 다녔던 뽀글하고 둥그런 파마머리를 하고 꽃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인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엄마는 그때도 아직 이십 대였다.

 엄마는 대구에서 두 번째로 좋은 상업고등학교를 나왔다. 예전에는 먹고사는 게 먼저라 인문계보다 실업계의 학교가 더 인기도 많고 경쟁률이 높았다며, 공부를 제법 잘해서 졸업 후 대구에서 제일 크고 좋은 백화점에 취직을 했었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왜 일을 그만두고 그렇게 일찍 결혼을 했냐고 물어보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말을 돌렸다. 이유를 아는 나도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학창 시절의 이야기로 말을 돌려 버린다. 엄마는 이십 대 때는 줄곧 힘든 기억이 더 많아서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외할머니의 기일이면, 할머니를 만나고 온 엄마는 매번 소주를 마셨다. 앞에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면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혼자서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넋두리처럼 읊조리곤 한다.

 "나도 우리 엄마가 참 보고 싶다. 너는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엄마가 없어본 적이 없어서 이런 말을 들으면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잔에 멀겋게 소주만 부었다. 엄마는 마흔이 될 때까지 술을 한잔도 마신 적이 없는 데 이제는 좋을 때도 슬플 때도 한 잔씩 마신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고등학교 삼 학년 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운 날이 떠오른다.


  토요일에도 등교를 해서 자율 학습이라는 걸 했었던 그날, 마치고 집으로 가니 엄마가 없었다. 시장에라도 가셨는 가 보다 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허기가 져서 부엌에 요깃거리를 찾으러 들어갔다. 평소와 달리 뚜껑이 채 닫혀있지 않은 반찬들이 널브러져서 싱크대 위에 놓여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뚜껑을 찾아 반찬을 냉장고에 하나씩 넣고 있자니, 갑자기 대문의 쾅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회사에 있어야 할 아버지가 몹시도 급박하게 들어왔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아버지는  말에 대꾸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보험증이랑   가지를 챙기더니, 종이 가방에 넣어  손에 들고 뛰쳐나가면서 말했다.

 "언니가 곧 올 건데 언니 말 잘 듣고 있어. 엄마가.. 좀 아파서 병원에 급하게 갔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엄마가 갑자기 병원에 있다고? 나가는 아버지 뒤로 평소에 주름 하나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으면 다리미를 꺼내서 칼같이 다리는 흰색 와이셔츠 한쪽이 구겨진 채 허리춤 밖으로 비집어 나와있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만 계속해서 울릴 뿐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다리를 나도 모르게 덜덜 떨고 있다. 엄마가 평소에 들어올 복도 나간다고 절대 떨지 말랬는데.


  엄마는 빨래를 걷고 옥상에서 내려오다가 쓰러지셨다. 마침 매일 왕래를 할 정도로 친하게 지내던 앞집의 아주머니가 삶은 고구마를 나눠서 먹으려고 집에 왔다가 발견을 하고 119에 신고를 했다. 그 길로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입원한 엄마에게 아버지랑 언니가 번갈아 가며 다녔지만 나는 남동생을 챙기고 고3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절대 빠지지 말고 공부하라고 하는 아버지 때문에 일주일이 넘도록 엄마를 보지 못했다. 한 번씩 엄마의 안부를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똑같은 말 뿐이었다. 괜찮아지실 거야.


  열흘쯤 지났을 즈음, 수업을 듣고 있는데 담임이 교무실로 부르더니 다급하게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서둘러 부른 택시 안에서 엄마가 하지 말라던 오른쪽 엄지손톱을 열댓 번 물어뜯었더니 혀끝에서 피맛이 났다.

 집에는 엄마가 없는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면도를 제대로 하지 않아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나있는 아버지가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며칠 안 본 사이 몹시 야위고 마른 거 같다. 잠시 침묵하던 아버지는 이내 양손을 무릎 위에 얹고 고객을 바닥에 떨구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아버지를 모른다.

"엄마를 보내줘야 할 거 같아."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사실.. 흑.. 중환자실에 산소마스크를 달고 있어.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검사란 검사는.. 죄다 했지만 병명을 아무도 몰라.. 의사가..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하래..

혜미도 엄마 보러 이제 가자.

내가 고작 십구 년 중에 열흘만 엄마를 못 봤을 뿐인데, 앞으로 엄마를 영영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다. 사실은 엄마를 보러 가면 엄마가 진짜 어딘가로 가버릴 거 같아서 가고 싶지 않았는 마음이 있었나 보다. 이젠 엄마를 당장 보러 가고 싶다. 꺼억꺼억 목메어 우는 아버지를 따라 나도 꺼억꺼억 울었다.

 


그런데 그날 밤 병원에 있던 아버지로부터 믿기지 않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가 기적처럼 일어났다고.

의사도 기적이 아니고서야 설명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간 중환자실에서 엄마를 봐왔던 언니는 그 소식을 듣고 오열을 했지만, 나는 낮에 아버지가 울 때 한껏 따라 울어서 눈물이 말랐는지 나질 않았다. 다만 그냥 엄마가 아픈 것도 다시 일어난 것도 실감이 나질 않고 내일 아침에는 여느 때처럼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병실 입구 문의 손잡이를 돌리자 물어뜯은 엄지 손가락 손톱 밑의 피딱지가 거슬렸다.

 '엄마한테 혼나겠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버석한 나무 가지처럼 말라버린 엄마가 등받이를 하고 침대에 기대어 있다. 엄마가 나를 보더니 뼈밖에 남지 않은 가느다란 팔로 나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미야. 엄마 고기 먹고 싶어. 고기 사줘."

(엄마는 이때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말하는 상태였다.)

순간 말랐던 눈물이 그냥 내가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이 흘러나왔다.


우리 엄마는 살았다. 나는 오열했다.

안도감이 들었다. 우리 엄마는 살았다.




 백종원의 프로에 한지민 배우가 나와서 엄마랑 술 마시는 걸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걸 보면서 나도 우리 엄마랑 술 마시는 걸 제일 좋아하는데 했다. 엄마는 이 나이 되어서 술 한잔 마시는 낙으로 살지 무슨 재미로 살아~하고, 나는 맞아 엄마 건강해야 술도 마시니까 술 많이 마시게 건강하자~고 대답한다.

코로나가 풀리면 엄마랑 같이 외국에 가서 좋다는 술은 다 마시고 다닐 참이다.

엄마. 내 곁에 오래오래 머물러 주세요.

세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술을 나랑 같이 마실 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주세요.


  

 

 


   


 

이전 11화 십공주와 반팅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