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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랑 Jan 18. 2023

이 편지는 영국으로부터 시작된…….

오래된 것을 지나치는 마음

 나는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 색이 바랜 책, 거친 음질의 테이프, 반쪽짜리 도장이 새겨진 우표, 사용할수록 심이 기울어지는 연필, 투박하게 빚은 자기, 올이 풀린 스웨터, 흠이 박힌 손목시계. 그래서일까 내가 빈티지, 재사용 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이. 시간이 축척된 물건이 잘 정돈된 곳에 가면 평소 없던 물욕도 마구 생겨난다.


 런던에서 한, 두 시간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에 간 적이 있다. 과연 영국 날씨, 이동하는 중간부터 회색 구름이 잔뜩 끼더니 결국 시야가 어두울 정도로 하늘이 꽉 막혀있다. 썩 반갑지 않은 날씨였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거주하는 사람이 적은 만큼 몇 없는 낮은 건물들이 풍경과 잘 어울리는 동네이다. 그런 동네를 둘러보며 조금 더 걸어가니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곳에는 폭이 좁은 냇가를 가운데 두고 가게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이 눈에 들어온다. 크지 않지만 통창으로 오래된 물건들이 잔뜩 보인다. 액세리부터 찻잔, 시계, 장난감 등 없는 것이 없지만 사람들이 보기 편리하게 진열되어 있다. 거리의 풍경을 보는 것보다 더 빠르게 눈이 돌아가는 이곳에서 한참을 구경하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오래된 편지다.


 오래된 느낌이 나는 편지가 아니라 실제로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다. 흑백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는 색이 바랜 편지, 어느 바닷가에서 산 엽서인 듯 커다란 배가 정박한 항구 그림 옆으로 짧게 흘려 쓴 글씨, 흠이 많은 작은 편지 봉투에 찍힌 우편 도장. 이렇게 크고 작은 편지들이 한 상자에 모여 있다. 함부로 다루고 싶지 않아 살살 들춰본다. 가격은 장당 2유로, 매력적인 물건에 매력적인 가격이 더해져 딱 한 장만 골라보자 마음먹는다. 아차 이 편지는 영국으로부터…라는 생각은 장난이고. 나는 편지를 받는 것보다 쓰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마음으로 편지를 쓰는지 조금은 알기 때문에 ‘내가 함부로 편지를 사도 되나’ 생각이 들어 구석구석 들쳐보던 손이 멈춰진다. 이 가게에 온 편지들은 이미 주인을 잃었겠지만 누군가에게 보내진 편지를 구매하는 행위가 마음에 걸린다.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다면 모를까. 한참 구경한 만큼 고민을 하고 결국 빈손으로 가게를 나왔다.


 그때는 아쉬운 마음에 가게를 나온 후에도 고민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잘한 결정이다. 남의 편지 욕심내지 말고 서랍에 묶여 있는 내 편지 관리에 신경 쓰자.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받아온 편지 양이 꽤 많다. 이 편지도 언젠가 영국에서 본 편지처럼 흔적이 잔뜩 생길 것이다. 그때 동안 잘 보관해 두었다가 내가 죽으면 같이 묻어주길. 평생 받아 온 편지와 함께 묻히는 것 낭만적이지 않은가... 하하.


 여행에서 편지 대신 우표를 잔뜩 구입했다. 다른 나라에 머물 때 숙소 근처 우표 박물관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 나라에 다시 가게 된다면 유명 박물관 대신 이곳을 다시 갈 만큼 좋은 공간이었다. 우체국 역사부터 그동안 발행한 우표와 만드는 방법이 흥미로워 한 발을 떼는 게 어려웠다. 그곳에서도 우표와 우편 도장이 찍힌 오래된 편지 봉투를 함께 전시하고 있었는데 나는 또 한참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잔뜩 산 우표로 나는 편지를 쓰고 있다. 올해 만났던 인연들에게 반가움을 담는다. 편지를 쓸 사람이 매년 줄어 아쉬운 찰나 올해 반가운 사람이 늘어 짧은 글들로 조금 바쁘게 12월을 닫고 있다. 내가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물건에 남은 흔적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가 아닐까. 나는 항상 지난 시간을 궁금해하는 사람이니까. 우리의 지난 시간을 담은 편지가 영국의 작은 마을에 모아져 있던 편지처럼 누군가에게 발견될 수도 있겠다. 곧 당신에게 도착할 메시지. 이 편지는 영국으로부터 시작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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