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마음먹었던 아주 솔직한 이유 : 현실도피
스니씨는 큰 기업 가면 못 버틸 거야.
몇 년 전, 나를 지독히도 힘들게 했던 상사가 던진 말이었다.
당시에는 애써 코웃음 쳤지만, 그 말은 독버섯처럼 끈질기게 내 안에 자라났다.
내가 지치고 흔들릴 때마다 저 말이 스스로에 대한 의심의 싹을 틔우며 서서히 나를 좀먹어갔다.
그리고 나는, 분하게도 그의 저주 같은 예언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대학 졸업 후 2년의 취준, 그리고 입사 후에도 카페로 퇴근해 이직 준비했던 치열한 시간들.
그렇게 이직해 상경한 직장은 취업 사기에 가까웠고, 두 달간의 숱한 고민 끝에 결국 박차고 나왔다.
다행히 곧바로 옮긴 직장에서 만난 상사는... 가스라이팅을 해댔다.
울면서 회사를 다니며 어떻게든 버텨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건강이 무너져 퇴사하게 됐다.
건강 회복에 전념하다 만족스러운 회사에 합격했을 때, 나는 드디어 이 지리멸렬한 싸움이 끝났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정확히 두 달 만에 ‘수습 미전환’이라는 통보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종종 접하는 ‘내 꿈을 위해 제 발로 퇴사했다’는 식의 멋진 서사는 내게 없었다. 타의로 점철된, 비자발적 퇴사의 연속. 구차하지만 그 와중에도 성과를 냈었다고, 그렇게라도 나의 자존심을 방어해야만 했다.
사업에 뛰어들었던 건, 어쩌면 그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표’라는 직함 뒤에 숨어 더는 잘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장이면, 대표면 나를 자를 사람은 없으니까.
가슴 뛰는 일로 돈을 벌고 싶다
대외적으론 ‘좋아하는 일, 가슴 뛰는 일로 돈을 벌고 싶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내면 깊숙한 곳의 진짜 욕망은 ‘대체 불가능한 사람’, 더 솔직히 말하면 ‘잘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이면에 얼마나 처절한 생존의 문제가 달려있는지는 애써 외면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일단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다.
자영업자 폐업률 100만 시대에 참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 2만 원짜리 물건 하나에도 가성비를 따지던 내가, 200만 원짜리 창업 강의는 망설임 없이 결제했다.
수강 일정이 겹쳐 하루에 세 개의 강의를 듣는 강행군도 마다치 않았다.
총 5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쏟아부었지만, 강의 내용은 그 값을 한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뚜렷한 창업 아이템을 선정하고 뛰어든 게 아니니 중구난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 혼돈 속에서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평소 영업은 절대 적성에 안 맞고 못 할 거라 생각했던 내가 무작정 사람들에게 다가가 영업을 하고,
콜드 메일, 지인 영업, 블로그, 오픈채팅방 수많은 채널을 넘나들며 홍보에 매달렸다.
상품 기획부터 랜딩페이지, 콘텐츠 제작까지,
‘온라인 마케팅 강의’라는 상품을 만들어
광고비 단 20만 원으로 300명의 회원을 모으는 작은 성공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유료전환 0건, 매출 0원.
첫술에 배부를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1년의 공백기로 이미 바닥난 통장은 나를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들어간 직장.
면접 당시 내 경력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인정해 준 곳이라 기쁜 마음으로 입사했지만,
3개월 만에 회사가 공중분해됐다.
업무 자료 하나 백업할 새도 없이 하루아침에 전 직원이 짐을 쌌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재취업은 또다시 1년이 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전의 경험으로 높아진 몸값이 내 발목을 잡았다.
서류 합격 후 면접 일정 조율 중 직전연봉을 듣더니 합격 취소 되는 일도 겪었다.
결국 15% 이상의 연봉 삭감을 감수하고 찾은 다음 직장마저,
또 3개월 만에 비상경영사태에 돌입하며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어느덧 접어든 30대,
나이에 비해 짧은 만 3년 경력
공백기 2년
3년 동안 5곳을 옮겨 다니며, 최근 경력은 4개월짜리 단기 근무가 이어진 ‘조각 경력’.
눈에 띄게 낮아졌던 합격률과
재취준에 대한 막막함,
그리고 놓친 기회로 인해 억울하고 분한 맘에
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운 날도 있었다.
요즘 나는 마음속에서 다시 고개를 드는 ‘이참에 다시 창업해 볼까?’ 하는 유혹과 싸우고 있다.
또다시 현실 도피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2년 전의 나는 메타인지가 부족했음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사업이란 좋아하는 일도, 잘하는 일도 아닌, ‘고객이 필요로 하는 일’과 나의 강점이 만나는 교집합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다시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막막한 상황,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전과는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이제 나는 지원할 기업을 고를 때,
‘이 일이 훗날 나만의 일을 시작할 때 어떤 도움이 될까?’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 작은 생각의 변화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모른다.
어쩌면 몇 년 뒤에도 그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을지도.
하지만 알 수 없는 인생, 어떻게든 흘러갈 것이고 나는 또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겠지.
어쩌면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제 밥 벌이 하는 게 참 대단한 일이라는 걸 느끼고 있는 요즘.
P.S
글의 시작에 ‘큰 기업 가면 못 버틸 것’이라는 말이 결국 사실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내 이야기의 최종 결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 한, 모든 실패는 과정일 뿐이니까.
언젠가 이 기록을 펼쳐보며 ‘참 치열하게도 부딪혔구나’ 하고 웃어넘길 그날을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