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된 실패와 무너진 커리어 앞에서 더 이상 ‘성장’을 논할 여력은 없었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주말에는 카페 알바를, 평일 오전에는 바이럴 마케팅 알바를 시작했다.
주 7일을 일했지만, 머리는 거의 쓰지 않았다. 남는 시간에는 원데이 클래스를 듣고, 공연을 보고, 여행을 다녔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었다.
휴식이 아니라 현실 도피였다. 회피가 답이 아님을 알면서도 눈을 가리는,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한 달이면 될 줄 알았던 기간이 두 달, 세 달, 네 달 이어졌다.
바이럴 알바에서 내가 만드는 건 콘텐츠가 아니라 ‘설정’이었다. 가상의 인물을 만들고, 그를 의사나 연구원으로 둔갑시켰다. 구글에서 찾은 타인의 얼굴을 프로필 사진으로 내걸고, 마치 진실인 양 제품을 추천하는 글을 썼다.
“이거 사진 도용인데요, 이래도 돼요?”
“걸리면 그때 내리면 되죠. 다들 그렇게 해요.”
그 무심한 대답을 듣는 순간, 첫 직장을 떠났던 이유, 사업을 할 때 들었던 죄책감이 떠올랐다. 제품력 없는 상품을 광고로 포장하는 일에 진저리가 났건만, 지금의 나는 그보다 더 노골적인 거짓말을 매일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님이 툭 하고 제안을 건넸다.
알바 말고, 정직원으로 전환합시다.
연봉은 직전 회사 최종 연봉으로 맞춰줄게요.
무너졌던 자존감이 비집고 올라온 것은 그때였다. 바이럴 경력도 없는 나에게 전 직장 연봉을 맞춰주겠다는 감사한 제안. 텅 빈 통장과 조각난 경력을 떠올리며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감각, 내가 아직 ‘값어치 있는 인력’이라는 확인이 간절했다.
이미 이 회사가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알바를 하며 충분히 보았음에도, 나는 ‘어디든 소속되는 게 낫다’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출근 며칠 만에 확신했다.
이곳은 물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끓는 냄비였다. 마케터라는 직함 뒤에 기획, 광고 세팅, 디자인 그리고 끝도 없는 CS 업무가 따라붙었다. 작은 조직에선 사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사장님은 나의 ‘유연함’을 칭찬했지만, 그것은 ‘무엇이든 시키기 편한 사람’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조각경력 끝에 전부를 다 하는 직무, 이 다음의 커리어는 사실상 종말이 아닐까.’
위기감이 늘상 따라다녔지만
‘내 사업할 거면 이런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물 밖으로 뛰쳐나갈 용기가 없어
익숙한 자기 합리화를 꺼내 들었다.
물이 서서히 끓고 있었다.
머지않아 조직 내에서 터진 불미스러운 사건과 시스템의 부재는 어느새 물이 끓고 있다는 걸 인지하게 하는 기폭제였다.
동료가 부장님에게 선을 넘는 농담과 성희롱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회사는 이 문제를 다룰 시스템이 없었다. 부장님은 사장님의 오랜 지인이었고, 그가 나가면 당장 업무를 백업해 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 동료는 퇴사했고, 사무실에는 사장님과 부장님, 그리고 나만 남았다.
그때 분명히 알았다.
여기서 더 머물면, 나는 단순히 익는 것을 넘어 완전히 녹아 없어질 것이라고.
사업? 그건 현실 도피 수단일 뿐이었다고.
다시 이직 준비를 시작했다. 연차도 없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서 병원 간다는 핑계로 면접을 보러 간 것은 사실상 단 한 번뿐인 탈출 기회였다. 만약 여기서 불합격한다면, 나는 이 물 속에서 녹아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기적적으로 한 스타트업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주변에서는 축하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화장실 갈 때 나올 때 심정이 다르다지만, 지난번 구조조정을 당했던 회사와 너무나 비슷한 데자뷔였다. 붙여준 건 감사하지만 또 같은 결말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입사 확정일을 받아두고도, 남은 영업일 7일 동안 6번의 면접을 더 봤다.
미안하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에게는 진짜 ‘마지막 직장’이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앞섰다. 그중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의 면접에서는 대놓고 입사 예정 사실을 고백했다. "연봉이 더 낮아도 좋으니 이곳에 오고 싶다"라고 어필했고, 다행히 내 사정을 봐준 회사는 당일에 면접 합격 소식을 전해주었다.
최종 관문인 경력 확인 및 평판조회를 위해 전 직장 팀장님과 동료들에게 연락했다. 감사하게도 다들 흔쾌히 응해주셨다.
이제 남은 것은 고용보험 이력 전체를 전송하는 일이다. 이력서에 차마 다 쓰지 못한, 짧게 스쳐 지나간 조각 경력들이 나의 발목을 잡지는 않을지 맘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내 경력은 깔끔한 직선이 아니다. 여기저기 기워 붙인 누더기 같을지도 모른다.
내 이력서를 처음 본 인사 담당자는 인상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짧은 근무 기간, 잦은 이동, 그리고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한 공백들.
누군가의 눈에는 ‘버티지 못한 실패의 기록’으로 보일 것이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렇게 바라 볼 때가 많았다.
덕지덕지 누더기 같은 내 경험들,
나는 이제 이것을 못난 조각들이 아니라 ‘콜라주(Collage)’라고 봐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