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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진 Jan 17. 2018

타고난 '고장 손'의 비애

미안해 물건들아

내가 지켜본 바로 사람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뭐든 안 그렇겠느냐만은) 예컨대 무언가를 사면 박스 셋부터 그대로 보관을 해두고, 고장 한번 없이 새것처럼 물건을 오래오래 쓰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뜯는 맛에 물건 사는 거지” 하면서 사자마자 포장을 다 뜯어 버리고, 몇 번 고장 나는 것은 기본이어서, 결국 쌩돈을 여러 차례 날리는 사람이 있다.


짐작했겠지만, 나는 완벽히 후자이다. 이른바 ‘본 내추럴 고장 손’이랄까. 특히 내 고장 손은 전자기기에 특화되어 있다. 한두 푼 되는 것도 아니고, 물건을 잘 간수하면 될 터인데, 어찌 된 일인지 내겐 너무나도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오늘은 ‘고장 손’을 거쳐 간 비운의 물건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아련)


가장 최근에 내 곁을 떠난 물건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무척이나 애정을 품고 있었던 전자책 리더기의 액정이 ‘끝내’ 망가졌다. 비록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왼쪽 귀퉁이가 부서지는 사고를 겪긴 했지만, 지금까지 잘 써왔는데. 또 다시 멀쩡한 기기 하나를 버리게 된 것이다.


물론 이건 약과다. 지난 몇 년간 써왔던 ‘소니 미러리스 카메라’로 말할 것 같으면, 렌즈를 무려 네 번이나 새로 샀다. 그중 두 번은 일본 여행을 하다가 고장이 났다. 그러다 작년에는 결국 오사카 카메라숍에서 니콘 카메라를 새로 샀다. 리코 카메라가 아주 많이 탐나긴 했지만, 어차피 내 손에 들어오면 금방 망가질 텐데? 하는 생각에 적당한 가격의 카메라를 샀다. (그동안 날린 렌즈값만 모았어도 리코 정도는 뚝딱 살 수 있었을 텐데!)


여러 전자기기를 쓰다 보면 각종 케이블과 충전기가 짐처럼 따라온다. 케이블타이에 묶어서 깔끔하게 보관하면 좋을 텐데, 귀찮은 나머지 항상 아무렇게나 케이블과 충전기를 던져둔다. 그래서일까. 매번 접촉 불량 문제가 생겨서 쓰지 않아도 될 돈을 또 소비하고 만다. 한번은 충전케이블에 문제가 생겼는지 충전 단자가 다 녹아서 블랙베리를 버린 적도 있다. 욕하면서도 쓰는 ‘예쁜 쓰레기’였는데, 진짜 말 그대로 쓰레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고장 손’이 물건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식물도 내 손을 피해갈 수 없다. 몇 년 전 한 친구한테 선물 받은 선인장도 죽어버렸는데, 내겐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선인장이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이후로는 식물을 키우지 않는다. 자신이 없기도 하거니와 죽은 식물을 마주하는 느낌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예쁜 꽃을 화분에 심어 키우는 대신, 예쁜 꽃을 말려서 드라이플라워로 만들었다. 생화가 뿜어내는 생기는 없지만, 드라이플라워만의 분위기가 좋아졌다. 잘 키우지 못해서 망가뜨렸다는 죄책감도 덜하고.


이 글을 마치며, 올해에는 물건을 소중히 쓰자고 다짐해본다. 처음 물건을 샀을 때 품었던 마음을 오래오래 유지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 나온 김에 오늘 밤엔 엉망진창으로 엉켜 있는 각종 케이블을 정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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