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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진 Mar 28. 2018

서울병


아주 가끔은 고등학생, 대학생 특유의 싱그러운 나이가 그립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때는 없었던 ‘돈’이 이제는 있기 때문이다. 대단히 속물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지만, 진짜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편집 일을 하면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온다. 아주 많은 돈은 아니지만 조금씩 돈을 모으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돈을 투자한다. 가장 좋은 건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돈 걱정을 크게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학생 때는 한 달 동안 주말 아르바이트로 받은 월급을 탈탈 털어 내일로 여행을 가도 돈이 많지 않은지라 여행 후반에 다다르면 돈이 얼마 남지 않아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돈이 모자랄 것 같아도 "까짓것 그냥 이번 한 달 적금은 조금 덜 넣지 뭐"하며 아낌없이 여행에 돈을 쓴다. 아직 철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작년과 올해에는 갑자기 서울을 떠나고 싶어서 여기저기로 떠났다. 여름휴가를 맞아 혼자 여행했던 제주, 한 달 전에 급하게 가족들과 시간을 맞춰서 떠났던 삿포로, 한 해의 마지막과 새해 첫날을 보냈던 겨울의 제주, 그리고 전날 부랴부랴 짐을 싸서 떠났던 경주, 그리고 간지가 폭발하는 공주와 부여 여행까지. 이 여행들의 공통점이라면 오랫동안 준비한 여행이 아니라는 것. 예전에는 여행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예약해서 준비를 하곤 했는데, 요즘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훌쩍 떠나는 순간이 많아졌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서울에서만 살아서 지독한 ‘서울병’에 걸렸다고 얘기할 정도다. 사실 서울에 살면서 엄청난 문화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서울을 떠나 조용한 마을에 정착하고 싶다는 꿈을 놓지 못한다.


여름에 다녀왔던 제주 종달리는 내게 있어 무릉도원, 이상향, 그러니까 유토피아다. 종달, 종달. 자꾸 입 밖으로 소리내어 부르고 싶은 제주의 동쪽 마을. 그곳에서 난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온몸으로 겪었다. 여행이라고 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는 법이 없는 나는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마을 근처의 바닷가를 찾아다녔다. 하염없이 버스가 오지 않을 때는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서울에서라면 당장에라도 택시를 잡았겠지만, 그 마을에는 택시도 거의 다니지 않고 무엇보다도 서둘러야 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3박 4일 남짓한 짧은 일정에 이곳저곳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동쪽 마을에 숙소를 잡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잡고 싶었다.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이 다니는 분교라든가, 소담한 돌담이라든가, 어디서 왔냐며 묻는 어르신들의 말을 놓칠 수 없었으니까. 그건 지금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니까.


서울을 떠나 혼자 여행하며 겪은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내 안에 쌓여가는 것을 느낀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어떻게 표현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조금 걱정되는 점은 서울, 그러니까 일상에서 지겨워질 때마다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리는 것이 최선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에도 제약이 생겨날 텐데, 그렇다고 난 그 제약을 모두 벗어던질 만큼 아주 자유로운 사람도 아닌데. 휴. 안다, 알아.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일을 벌써부터 지레 겁먹고 걱정하는 것 역시 이 지독한 만성질환 '서울병'의 증상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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