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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초록 Aug 16. 2023

4. 산산조각 K-풀드포크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5개월 동안이나 일을 쉬었다. 퇴사 이유는 간단했다. 내 기준의 즉시 퇴사 기준까지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간혹 누군가에게 퇴사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줄 때마다 내가 늘 하던 말이었다.


'이 놈의 회사 내가 퇴사하고야 만다.' 이건 건강한 생각이에요. 상황에 따라 함부로 관둘 수는 없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에요. 하지만 '내가 죽어야지 이 일이 끝날까?',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회사 안 가도 되니까'까지 온다면 그 직장이 삼성이라고 해도 그만두시는 게 나아요.


그랬던 내가 후자의 생각을 했다. 내가 죽어야만 끝나는 이 천일야화를 살아서 끝내고 싶었다. 주말과 연휴 할 것 없이 집에서조차 무급 재택을 시키던 회사였고 이미 퇴사 일정이 잡혀 있는데도 연차 두어 개 내주기가 아까워서 코로나 의심환자인 나를 출근시키던 그 회사에 장문의 메일을 남기고 퇴사했다.


속 편하게 놀고 지냈다기엔 처음 두 달은 뒤늦은 대학 졸업과 퇴사로 인한 극심한 번아웃에 시달렸다. 그다음 두 달은 이사 준비와 이사, 종합소득세 문제로 세무서를 오갔다. 마지막 한 달은 그동안의 공백에 무너져 내린 내 멘털을 혼자서 추스를 수 없어 다시 무언갈 시작한다는 게 끔찍이도 무섭게 여겨졌다. 무망감이 나를 지배했다.


하지만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는 시작이 힘든 일들을 억지로 약속이라도 잡으면 하게 되는 책임감에 기대기 위해 상담을 신청했고 혼자 보는 일기장으로 쓰던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고 다시 구직 사이트를 들여다보았다.



다행히도 예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잠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고 기존 실수령액의 2/3 수준이었지만 나름의 재활기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계절은 여느 때보다 더운 여름이 되었다. 늦은 밤이 아니면 먹을 것을 만들기 위해 불을 켜는 것조차 힘든 여름. 불을 최소화해서 할 수 있지만 단백질이나 비타민B가 가득한 것을 먹고 싶었다.


집 근처 정육점에서 사 온 전지 한 근을 깨끗이 씻어 둔 밥솥에 넣는다. 고기를 살 때 서비스로 받은 월계수와 껍질과 뿌리를 자른 양파 두 개, 통후추, 마늘에 된장 두 수저를 퍼서 넣었다. 물 500ml와 소주를 조금 부어준다. 그래도 20만 원 후반대의 솥이라 만능찜 기능이 있지만 40분쯤 소요되는 잡곡 취사 버튼을 누른다.



딱히 편히 살아온 적도 없지만 지금 어느 때보다 내 삶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필사적으로 지켜온 것들은 도미노처럼 쓰러지고 어딘가 다시 쓸 수 없이 망가진 것도 같았다. 밥솥 안에서 완성된 수육은 집게로 집어 올리려다 툭 끊어져 발 등에 뜨거운 기름이 튀어 화상을 입었다. 겨우 도마 위로 올려 칼로 예쁘게 자르려고 보니 형체를 유지하지 못한 채 으깨졌다.


이게 뭐라고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그냥 따뜻하게 밥을 먹고 싶었을 뿐인데.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대충 싱크대에서 소금기만 씻어낸 뒤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그리고 접시에 담은 으깨진 수육과 그 소스를 담아 식탁에 차려놓고 밥을 먹었다.


결결이 찢어진 고기는 부드러웠다. 된장과 캐러멜라이즈 된 양파의 달큼함이 가득 배인 껍질과 비계는 살코기보다도 단 맛이 가득했다. 엄마가 보내 준 설익은 김치와 엄마가 알려준 방법대로 만든 경상도식 막장과 함께 한참을 먹어댔다. 재료비 8천 원으로 차려낸 근사한 한상이었다.


단톡방에 저녁 사진을 올리자 친구들은 맛있겠다며 난리였고 나처럼 고향을 떠나 와 수도권에서 살고 있는 한 동생은 내게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했다. 풀드포크 같다며, 내일 꼭 해 먹을 거라고.


다음날 톡방에 올라온 K-풀드포크의 사진. 요리 과정부터 새로 한 병과 쌈채소까지 한상 거하게 차린 친구의 밥상이 있었다. 너무 맛있다고 천재라며 나를 치켜주는 고마운 사람.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친구가 전에 알려 준 정호승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완벽히 잘 해낼 수는 없는 삶 속에서 실패에서도 무언갈 배우고 생각지도 못한 맛과 온기를 느낄 수도 있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은 망친 수육이 아니라 성공한 K-풀드포크였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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