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이지 않는 후회의 재생산에 대하여
엄청난 비가 휘몰아치고 지나갔습니다. 기분 탓인지 더위도 한풀 꺾인 듯도 합니다. 새벽에 더워서 눈을 뜨곤 했는데, 이젠 이불을 잘 덮지 않고 잤더니 목이 칼칼하기까지 하네요. 이렇게 아닌 듯하지만 시간은 흐릅니다. 그리고 흐른 시간 뒤로 남는 것은 크고 작은 후회들입니다.
시간은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고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렇게 할 걸, 이렇게 하지 말 걸, 한 번 더 할 걸, 조금 덜 할 걸'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나 봅니다. 조금이라도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서요.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모범형사 시즌1을 정주행했습니다. 시즌2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시즌1을 3분의 1 정도 보다가 말았던 기억이 났어요. 착한 경찰이 나쁜 사람을 추적하고 결국 잡게 되는, 통쾌한 액션물을 기대하고 봤는데요. 거기서 저는 '내가 이랬더라면'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는 두 주인공과 그 주변 사람들을 만납니다. // 스포일러 주의. 액션도, 약간의 코믹함과 감동도 있었기에 아직 못 보신 분들은 제 글을 읽기 전에 시리즈를 보고 오심을 추천드립니다.//
대강의 줄거리는 두 주인공 오지혁(장승조 역)과 강도창(손현주 역)이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사형수가 된 이대철(조재윤 역)의 누명을 벗기고 진범을 잡기 위해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는 내용인데요. 그 와중에 기업, 언론, 검찰과 경찰 간의 유착과 비리, 파워 게임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범인이 누굴까, 누가 나쁜 놈이지, 이다음엔 또 무슨 비밀이 밝혀지려나 궁금해하면서 봤는데, 극의 중반부에 들어서자 서서히 (제가 생각하는) 드라마의 메시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은
후회가 아니라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
오지혁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살인을 목격하지만 범인의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는 이듬해 목숨을 끊게 되는데요. 자신이 진범의 얼굴을 기억했더라면,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라는 끝없는 고뇌에 빠져듭니다. 강도창은 승진도 못하고, 이혼한 여동생과 함께 사는, 의리는 있지만 실속은 없는 캐릭터예요. 옆 팀에서 넘겨받은 이대철 사건을 대충 처리해 결국 그가 사형을 선고받는데 일조하는데요.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사형은 집행되고 말죠. 돈을 받고 증거를 조작하고, 자신의 실수를 덮기에만 급급한 다른 형사들에 비해 완전 용기 있고 정의로운 인물이지만,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괴로움에 몸부림칩니다. 그 외에도 주변 인물들은 자신이 저질렀거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반성하고, 때론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이러한 갈등들 - 내 안의 갈등, 또는 다른 이들과의 갈등 - 은 결국 삶을 척박하고 피폐하게 만듭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랑임을 작가는 여러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데요. 오지혁이 사회부 기자 진서경(이엘리야 역)과 사건 해결을 위해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다 술 한 잔에 기절하는 - 실제로는 잠들어버리는 - 장면은 늘 긴장과 괴로움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오지혁이 진서경과 점점 더 교감하면서 마음을 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강도찬도 이대철의 딸 은혜(이하은 역)를 거두면서, 은혜도 강도찬, 그리고 그의 여동생과 동료들의 관심과 보호를 받으면서 서로를 서서히 구원해 갑니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혼자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현실이 변해가는 것이기에 구원이라 생각합니다.
이외에 주변 인물들 - 강도찬의 여동생, 사회부 기자 진세경, 인천 서부 경찰서 문상범 서장 등 - 의 변화에도 결국 사랑의 힘이 작용했다고 믿지만 이 모두에 대해 세세하게 쓰는 것이 그다지 의미 전달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여기서 이만 줄이려 합니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이렇게 큰 사건과 선악의 얽히고설킴이 현실에서 매일 일어나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후회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죠. 출근길에 놓친 지하철로 지각을 하고, 회사에서 싫은 소리를 들은 탓에 하루를 온전히 망친 것에 대한 후회로 그 한 주가 심히 괴로울 때도 있을 것이고, 망친 성적과 프로젝트로 전전긍긍하며 몇 달을 보내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결국 좋지 못한 일을 흘려보내지 못하는 마음은 후회가 더 큰 후회를 만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데요.
이럴 땐 안을 보지 말고 밖을 보는 건 어떨까요? 나의 문제를 보지 말고 나와 같은 문제를 가진 이들을 보는 거예요. 그렇게 그들도 나와 같이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면 묻지 말고 손을 또는 가만히 등을 내밀어 줍시다. 그렇게 계속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을 보고 함께 있으면서 문제를 관망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죠. 마음만이면 됩니다. 해결해주려고 할 필요 없어요, 해결해주려고 할수록 안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기 때문에 해결해줄 수는 없거든요. 그저 가만히 괜찮아, 다 괜찮아라고 대신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마음은 전달될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