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 닐 도널드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 1권>을 읽고 리뷰를 썼습니다. (리뷰 보러 가기)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그때는 좀 더 책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좀 더 자신 있게 신이 이렇게 말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년 여가 지난 지금, 2권을 읽고 저는 좀 더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내가 이해한 것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구심이 들고, 책을 읽은 내용을 정리하기도 벅찹니다. 글을 써나갈수록 나의 참된 마음이 아니라 보여주기식 글쓰기가 아닌지 두렵고,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조심스럽습니다.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며, 글이 나아지기보다 나빠지는 건 아닌지, 이건 글이 아니라 징징거림이 아닌지 불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불안 속에서 눈에 들어온 머리말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원고를 세상에 내놓아서 사람들을 일깨우겠다는 게 내 목적은 아니다. 나는 단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신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들이 여러분에게 솔직하고 숨김없이 전달되길 바랄 뿐이다. 나는 신에게 그렇게 하겠노라고, 즉 이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겠노라고 약속했으며, 나는 그 약속을 어길 수 없다.
여러분 역시 약속을 어길 수 없다. 분명히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과 관념과 신념이 계속 도전받도록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분명히 여러분은 계속해서 성장하겠노라고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그런 약속을 한 사람만이 이 책을 집어들 것이다.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 19 머리말 중에서
내가 이 책을 다시 읽고, 이 리뷰를 쓰고자 하는 것은 신과의 약속이므로, 이를 통해 나는 '계속해서 성장하겠노라고 굳게 약속했기' 때문으로, 이 글은 나의 성장에 대한 기록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글을 써나가기로 했습니다. 작가인 닐 월쉬 또한 이 2권을 쓸 때쯤, 1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평가 속에서 힘들었을 텐데 이 책을 완성했다는 것 또한 제게 마음의 위안이 되었습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는 모든 페이지에 밑줄을 긋고 싶을 만큼 내용이 좋고, 주제들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각 챕터별로 눈에 들어온 글귀들과 스스로 느낀 바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신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는 첫걸음은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하나'임을 알고 깨달을 때까지 우리와 신이 '하나'임을 알고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 28
책을 읽고, 다시 정리하면서 보니 '아, 신은 이미 책 첫머리에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했구나!'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나와 네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모두가 남을 나 자신처럼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는다면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요, 천국이 아닐까요? 내가 옳고 너가 틀렸음을 증명하느라 애쓸 필요도 없고, 이해받지 못한다고 오해할 여지도 없이 그렇게 존재하기만 한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선"이란 건 오만가지 변수에 좌우되는 상대적인 용어다. 이건 선택을 대단히 어렵게 만든다. 어떤 판단을 내릴 때는 오직 한 가지만 고려하면 된다. 이것이 '내가 누구인지 Who I Am'를 진술하는지, 이것이 '내가 되고자 선택하는 존재 Who I Choose to Be'를 선언하는지만.
삶 전체가 그런 선언이 되어야 한다.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 43
'최선'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말은 제게 많은 위안을 주었습니다.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길을 쌀 한 가마니를 지고 오르다가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구덩이에 빠진 바퀴가 '탁'하고 빠져나오는 그 순간의 시원함도 느꼈습니다. 최근 몇 년간 회사를 그만두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면서, 저는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음에 실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회사를 다닐 때는 일을 하면 월급이 나오고, 경력이 쌓이면 직책도 오르니 나름 결과를 만들고 있었다 믿었는데요. 막상 큰 바람을 갖고 나왔지만, 세상의 기준에 보여줄 만한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 저를 위축시켰습니다.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억울함까지 더해지니 감정은 격해지고, 이런 나 자신이 다시 더 작아지는 악순환이 이어졌지요. 하지만 '최선'이 아니라 '선택'이라니!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고자 하면,
그렇게 되길 선택하면
(p. 58)
물론 쉽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매일 아침 일어나 마음 단단히 먹고 다시 결심을 해야 하는 선택일지라도, 나의 선택이기에 가는 길은 최선을 다해 가는 길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너는 자신이 창조한 드라마의 창조자가 아니라,
그 드라마에 헌신하는 것을 삶이라 생각한다.
(p.60)
즉, 내가 삶이라는 드라마의 창조자가 되는 것이지요. 정해진 스토리에 따라 살면서 이 한 몸을 바치는 삶이 아니라는 당연한 진리를 저는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순간', 이 순간, 영원한 지금 순간뿐이다. 모든 일이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으며, 그래서 내 영광은 바로 지금 찬미받고 있다. 신의 영광을 기다리는 일 같은 건 없다... (중략)... 여기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것은, '모든 것 전부'는 그냥 '존재한다'.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 68~69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시작과 끝이 없으니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옳고 그름이 없으니 이를 따져 물어 갈 천국과 지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 여기(NOW HERE)만이 존재한다는 말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어떤 이는 갈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수도 있고, 다른 이는 자신을 옥죄어 오던 수많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느낄 수도 있겠지요. 저는 여기에 아래 두 문장을 더하고 싶습니다.
내가 계획하는 것은 이미 이루어졌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따라서 될지 안 될지 고민하며 어떤 일을 계획하지 않고 '그냥 하면(Just do it)'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면 좋고, 생각한 대로는 아니더라도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일이든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쌀을 물에 넣고 끓이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이미 나는 완벽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더더욱이 없습니다.
'히틀러체험'을 창조한 것은 "우리"대"그들", "우리"와 "그들"이라는 분리와 차별과 우월 의식이다.
'그리스도 체험'을 창조한 것은 "네 것"/"내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라는 '신성한 형제애'와 통일과 '하나됨'의 의식이다.
고통이 "너희 것"일 뿐 아니라 "우리 것"이기도 할 때, 기쁨이 "내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것"이기도 할 때, 그리하여 삶의 체험 전체가 '우리 것'이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삶의 체험 전체the whole는 진실로 말 그대로 온전한 a whole '삶의 체험'이 된다.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 110
'히틀러는 지옥에 가지 않았다.' 보다 아마 한국인에게는 '일본 전범 또는 친일파는 아무도 지옥에 가지 않았다.'는 선언이 더욱 파장이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선언은 내가 어떤 잘못을 해도 나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살아있는(?) 반증이기에 강력하게 다가왔습니다. 동시에 삶에서 겪는 모든 일들이 (히틀러와 그리스도라는) 개인의 차원이 아닌 우리 모두의 '체험'을 위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나=너=우리=신’의 공식이 다시 한번 참이라 검증된 듯했고요.
자, 이제 너는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자신이 '시공간 연속체'의 모든 수준level에서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너희 영혼은 '항상 존재했고', '항상 존재하며',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지니'. 끝없이 그러할지니, 아멘.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 124
지금 이 글을 이어 쓰는 이 순간, 현재(present)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길이로 존재하는 선물 같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며 지금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지요.
너는 단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존재다.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 125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존재한다는 것은 남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하다거나 특별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단 하나 뿐이라는 '유일무이성'의 증명이며, 다시 한번 '나=너=우리=신'이라는 공식의 검증입니다.
책을 읽고, 리뷰를 쓰면서 나는 신을 만나고, 신이 되고, 이 리뷰를 읽는 누군가가 신을 만나게 하고, 신이 되게 하고, 이를 통해 다시 신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삶의 모든 비밀을 벗기려고 이 귀중한 순간들, 너희의 지금 현실을 낭비하지 마라. 그 비밀들은 까닭 있는 비밀들이다. 너희 신을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해 주고, 너희의 지금 순간을 가장 고귀한 목적인 '참된 자신'을 창조하고 표현하는 데 사용하라. '자신이 누구인지', 되고자 원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하고, 그런 다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너희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 129~130
우주의 삶을 이해하게 되면, 너희는 너희 내면에 있는 우주의 삶을 이해할 수도 있다.
삶은 주기로 순환한다. 모든 것이 순환한다. 모든 것이. 이 점을 이해할 때, 너희는 그 '과정'을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많이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주기로 순환한다. 삶에는 타고난 리듬이 있으며, 모든 것이 그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모든 것이 그 흐름대로 따라간다.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 137
<신과 나눈 이야기>의 매력은 순환한다는 것입니다. 성(性)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영성에 관한, 우주에 관한 이야기가 되고, 정치로 교육으로 흘러갑니다. 그렇게 무한히 커졌다가 지극히 개인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 우주의 섭리이고, 삶의 원리라면 이 책이 이렇게 쓰일 수밖에 없었겠다 싶습니다.
특히 너희는 육체의 기쁨을 좋게 느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너희 할머니들이 속삭이면서 이야기했듯이) "섹스......"라면 절대로 안 된다. 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다. 섹스를 사랑해도 좋다! 또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좋다! 사실상 이것은 명령이다.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 143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 생각했지만, 나의 성생활에 대해 가까운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단 생각에 미치자 성(sex)에 대해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얘기를 할 때 괜히 부끄러워하거나 다른 단어로 바꿔 말하기도 하고, 불쾌해하거나 화제를 전환해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죠. 또 그런 얘기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렇고 그런 사람으로 매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연스럽지 않고, 불편하고 경직된 느낌인데요. 이런 상황은 우리가 받은 교육과 통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종교는 남들의 생각을 탐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너희를 부추기지만, 영성은 남들의 생각을 내던지고 자신의 생각을 따라잡도록 너희를 이끈다. "기분 좋은 것"은 자신의 방금 생각이 진리이고, 방금 말이 지혜이며, 방금 행동이 사랑임을 자기 스스로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151
얼마 전 미국에 사는 친구를 만났는데, 미국에서 사는데 힘든 게 뭐냐는 질문에 '동성애와 성전환'을 언급했습니다.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는 남학생을 학교에서 어떻게 처우해야 하는지 - 예를 들면 여자 화장실이나 탈의실을 사용하게 해야 하는지 - 등에 대한 이슈가 연일 발생한다고 해요.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잘못된 영향을 줄까도 염려되고, 그로 인해 불미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모 된 입장에서는 아이들도 곧 성인이 될 터이니 흘러가는 대로 둘 수는 없지 싶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받는 영향을 부모가 통제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형성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황금빛'처럼 발산되는 너희의 에너지는 끊임없이 다른 모든 것과 다른 모든 사람과 상호작용한다. 그 에너지는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진해지고, 멀어질수록 더 옅어지지만, 그럼에도 너희가 어떤 것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 (중략) ... 지구 위의 그리고 우주 속의 모든 사람과 사물이 전방향으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 161
신은 성(性)을 에너지의 상호작용,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나와 너가 연결되어 있음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방법이라 설명합니다. "SEX(The Synergistic Energy eXchange)(p. 166)"란 우주의 리듬이자 삶의 리듬이자 신의 리듬인 것이죠. 이를 어떠한 기준에 맞춰 규제하고 판단하고 부정하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을 막아 썩게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결정을 내릴 때 중심되는 질문은 "사랑은 지금 무엇을 하려 하는가?"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영향받거나 관련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만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너희는 그 사람을 해칠 수 있거나 해칠 것 같은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궁금증이나 의문이 남는다면, 너희는 그 문제를 명확히 이해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175
그렇다면 어떠한 기준도 없는 것일까? 하는 질문에 신은 바로 답을 줍니다.
사랑은 지금 무엇을 하려 하는가?
여기서 '사랑'은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하는 이타적인 사랑이나 육체적인 욕구를 배제한 플라토닉한 사랑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신은 "천만에, 너희는 항상 자신을 가장 먼저 내세워야 한다!(p.177)"고 말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육체와 정신, 영혼의 3중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이 모두를 알고 느끼며 3중의 존재로 존재할 때 균형을 취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측면, 정신적 측면, 영혼적 측면 모두에서의 '나'를 보살피고 '우리'를 사랑하며 책임을 지는 거죠. 육체를 경멸하거나, 정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영혼만을 우상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남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않고서 나의 성장을 느끼며 자각해야 합니다. 정신과 영성은 고결한 것이고, 물질적인 욕구는 속세에 찌든 우리가 아직 버리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물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보면서 괴로워해왔지요.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금욕의 논리보다 더욱 나의 몸과 마음을 가볍고 맑게 하는 듯합니다.
최대의 성장은 최대의 자유를 행사할 때만 이루어진다. 아니,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
만일 너희 모두가 다른 누군가의 규칙을 따르고 있다면, 너희는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복종하고 있을 뿐이다.
너희의 설정과는 반대로 내가 너희에게서 원하는 것은 복종이 아니다. 복종은 성장이 아니니, 내가 바라는 것은 성장이다. -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p. 178
그렇게 사랑이라는 나만의 규칙으로 나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누군가의 규칙을 찾고 싶은, 복종의 열망이 고개를 들 때도 있지만, 최대의 자유를 누리며 최대의 성장을 찾고자 하는 선택은 오늘도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