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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라 Jan 31. 2022

나그네의 변명

또 다른 도망을 계획하며 


우리 모두는 삶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는 것이고, 죽지 않거나 늙지 않는 법 따위는 모른다. 우리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즐겁고 행복하게, 이왕 사는 거 많은 이들의 존경과 부러움도 받는다면 좋을 일이다. 인간은 늙은 개가 한쪽 구석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듯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쩌면 '잘 늙는다'는 것도 한 쪽으로는 피할 수 없는 노화를 받아들이되 다른 쪽으로는 젊은 가슴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이 순간순간을 강렬하고 기쁘게 보내려는 일은 자신의 삶에 의미 있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순간들을 희생해 원하는 삶을 이룩해내려는 일은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무언가로 바꾸고자 하는 일이다. 그렇게 인간은 삶에서 수많은 의미들을 만들면서 죽음과 노화, 망각과 허무에 저항한다. 


작년 가을부터 쓰기 시작해 지금은 침체기에 머물러 있는 이야기가 있다. 플롯은 단순하다. 주인공이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를 찾고 싶어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항상 어디론가 간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왜 떠나야만 합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떠나는 일 자체가 질문을 제대로 산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살 수 없는 것이고, 세상의 지식을 망라한 누군가에게 물어본다고 들을 수 있는 답이 아니다. 그래서 떠나는 것이다. 자신의 질문을 온몸으로 겪기 위해. 말하자면 그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멀리에 있기 때문인 것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떠나는 것은 질문을 살아보고자 하는 태도를 갖추는 일이다. 


물론 떠나지 않고도 찾을 수 있겠지. 살아가야만 하는 일상 속에서 매일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익숙한 사람과 사물들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볼 수 있다면.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한 곳에 오래 있지 않고 여행길에 오르는 이가 더 도전적이고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은 정반대다.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연약하기 때문에 매번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뭔가를 도전하려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주는 속박과 권태감을 잠시 잊기 위해 도피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정말 정확히 본 것이다. 


맞다. 새로운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음식들은 오래 두어 숙성시킬수록 더 깊은 맛을 낸다. 삶에도 오래 두고 보아야 더 다채로운 의미들을 가져다주는 것들이 있다. 수많은 인고의 시간을 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하룻밤의 강렬한 사랑을 하는 젊은 연인의 생기 넘치는 뒷모습보다 오랜 시간을 동고동락한 노부부의 쇠잔한 뒷모습이 더 숭고해 보이는 것처럼. 삶의 모든 권태와 수고로움을 견뎌내야만 비로소 보게 되고 얻게 되는 것이 있다. 정말 권태와 진부함을 견디는 성실함이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나의 주인공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앉아 말하는 법은 영영 모르고 말 것인가?


아직은 그래도 되는 나이라고, 젊을 때는 원래 그렇게 방황도 하고 여러 경험을 많이 쌓아도 된다는 말들은 언제까지 나를 지켜줄 수 있을까? 조금 있으면 그런 말들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래도, 우선은 변명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다른 도리가 없다고. 죽을 때까지 모범적인 삶에는 적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그것이 두렵지만 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가까운 사람들은 사실은 그렇게 도망치듯 사는 삶을 즐기고 있지 라고 묻는다. 내 속내를 간파한 것이다. 사실은 도망치는 것이 즐거울 때가 있다. 최근에도 도망치는 꿈을 꾸었는데 잠시나마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에서 자유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번 목적지는 카자흐스탄이었다. 이 느낌을 무슨 수로 포기한단 말인가. 우선은 그렇다. 운이 좋으면 발 디딜 곳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나그네들은 내 편을 들어줄 것이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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