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애정하는 모임이 생겼다
제주에 와서 내가 가입한 첫 모임은 그림책 모임이었다. 아이를 키우며 그림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고 익숙한 것이니 크게 힘들이지 않고 모임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지에서는 하고 싶어도 시간이 맞지 않아 하지 못했던 모임인지라 기회다 싶어 회원모집공고문에 적힌 연락처로 바로 연락했고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사실 아이와 두 달을 꼭 붙어있다가 타지에서 보낼 혼자만의 시간이 무섭기도 했다.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 초조 짜증이 올라오는 병이 있으므로 무언가를 해야 했다. 엄마, 아내가 아닌 온전히 내 이름으로 불리는 시간이 필수적인 나에게 딱 맞는 모임이었다.
그림책은 매개일 뿐, 해본 적은 없지만 집단 상담 같은 느낌이었다. 나에게는 그랬다. 그림책 모임을 통해 사람에 대한 경계가 많이 무너졌다. 감정을 주고받는 모습, 서로 의견차이로 인해 생기는 갈등상황에서 화내지 않고 어른스럽게 풀어가는 모습 등 대인관계의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들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그림책 모임에서 내 이름으로 지내는 두 시간이 참 많은 느낌을 준다. 마음에 볕을 쪼이는 시간 같기도 하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 같기도 하다.
이번 모임은 더 특별했다. 바로 소풍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듣기만 해도 설레는 말이 되어버렸다. 서른여섯의 소풍은 아이의 김밥을 싸는 일인데 내가 가는 소풍이라니 참 많이 설레었다. 포틀락피티라는 것도 처음 해봤다. 나는 머핀을 구워갔는데, 칭찬을 참 많이 해주셨다. 무언가 내가 한 것, 내 것을 내놓는다는 게 참 많은 용기가 필요한 나로서는 대성공이었다. 선생님들의 말 한마디로 더 큰 용기가 생겼다. 한편으로는 시댁과의 관계에만 몰두해서 인간은 참 별로라는 생각하던 나에게 인류애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소풍장소는 동아리 대표 선생님댁이었다. 손님을 치르는 일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실 텐데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선생님들을 보면서 나누고 베푸는 게 얼마나 큰 능력인지 매번 나갈 때마다 배운다. 수업은 회원 모두가 돌아가며 정해진 날짜에 강사가 되어 그림책을 정하고 관련 주제로 독후활동이나 토론식으로 진행이 된다. 다들 실력들이 출중하시고 재능들이 많으셔서 같은 동아리 회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말 퀄리티 높은 수업을 듣는다.
이날 수업은 캐리커쳐 그리기였다. 하얀 도화지를 마주하는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 내 사진도 안 찍은 지 너무 오래되었는데 내 얼굴 그림이라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온전한 시간이었다. 캐리커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열심히 연필을 움직여봤지만 쉽지 않았다. 내 모습 그대로를 그리려고 애썼다.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아닌. 내 생김새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선생님의 도움을 조금 받아 완성했다. 예쁘진 않았지만 마음에 들었고, 예쁘다는 말보다 닮았다는 말을 듣고 더 기분이 좋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아이 하교 시간이 임박해 부리나케 갔다. 너무나도 재밌어서 가기 싫었다. 그렇지만 나는 애데렐라 인걸. 엄마라는 이름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또 책임을 다하러 열심히 부아앙 달려갔다. 그림책 모임은 즐거웠냐는 아이의 첫마디에 언제 이리 컸지 싶기도 하고 참 많이 고마웠다. 나의 그림책 모임 1호 지지자.
그렇게 서른여섯의 본인소풍은 애데렐라로 끝이 났지만 오랫동안 두고두고 꺼내볼 소중한 추억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관계 트라우마를 조금씩 극복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