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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06. 2024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질문

아빠의 부재

스물여섯. 무작정 오른 제주올레길. 걸으면서 참 많이 울었다. 돌아가신 지 22년 되었던 아빠를 그때서야 보내드린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아빠 없이 자란 어린 나를 보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태어난 지 백일 무렵 아빠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그 이후로 3년 정도 더 사셨다고 한다. 내가 다섯 살, 오빠가 열두 살에 아빠는 엄마와 우리 남매만 두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사실 나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빠가 살아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 수련으로 몸을 회복하느라 중국에서 지냈다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내 기억 속에는 마흔의 젊은 아빠인데 꿈에서 만난 아빠는 생각보다 흰머리도 많았고 주름도 많았지만 혈색은 좋았다. 진짜 아빠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아빠는 장성하다 못해 늙어가는 오빠와 나를 보고는 많이 컸다고 말했다. 이 나이가 되어도 아빠에겐 아직 아기처럼 보이나 보다. “그것 봐 엄마, 아빠 돌아온다고 했잖아.”라고 되뇌며 꿈에서 깼다. 한동안 멍하다 그리운 이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빠는 나를 무척이나 예뻐했다고 한다. 양가의 첫 손자였던 오빠보다도. 그도 그럴 것이 나와 아빠는 띠가 세 번 도는 띠동갑이다. 스물여섯도 아닌, 서른여섯에 얻은 둘째가 딸이라니. 지금은 결혼을 늦게 하는 추세라 서른여섯이면 첫째 출산을 하는 나이이기도 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아빠와 서른여섯 살 이상 나이 차이 나는 친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모들 말에 의하면, 아빠는 내가 태어나고 자기 딸 낳았다고 춤까지 췄다고 한다. 또 내가 어렸을 때 훌라후프를 곧 잘했는지 아빠는 딸내미가 훌라후프를 잘한다고 어찌나 자랑을 하고 다녔는지 모른다고 했다. 훌라후프가 뭐라고. 내 기억에는 없지만 그렇게 아빠가 나를 사랑한 이야기들은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구전동화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해 들려온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살아온 어린 시절은 구전동화의 반의 반만큼도 아름답거나 따스하진 못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는 학기 초마다 교무실에 가야 했다. 한부모가정이기 때문이었다. 결손가정 아이들을 불러 급식비 지원안내, 결손가정이지만 잘할 수 있다는 무의미한 격려의 말을 듣곤 했다. 새 학년마다 있는 일이지만 적응이 되지도 않았고 무뎌지지도 않았다. 교실로 돌아가면 새로 친해진 친구들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매번 겪는 일이지만 그 물음에는 항상 당황했고 머뭇거렸다. 함께 다녀온 아이의 사정을 아는 다른 아이가 “쟤 엄마 없잖아, 엄마 없는 애들 불렀나 봐.”라고 했다. 그 소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그 순간 내게 물었던 친구도, 나도 얼어붙곤 했다. 아빠의 빈자리는 평소 생활에서보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아빠 없는 아이라는 낙인과 시선을 느낄 때 알 수 있었고 어리석게도 매번 나는 좌절했다. 그래서 나는 빨리 성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아빠 없는 아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었어도 마음한구석은 여전히 시리고 아팠다. 지금도 그렇긴 하다.


얼마 전, 시아버지 노쇼사건으로 크게 말다툼을 한 후 첫 외출이었다. 남편 차를 타고 서귀포로 가고 있었다. 차창밖으로는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뒷자리에서 아이와 강아지가 쌔근거리며 자는 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하늘을 보고 있자니 문득 아빠 생각이 났다.

“여보, 아빠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러게. 당신이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질문이지. "

"우리가 결혼을 했을까? “

“장인어른이 쉽게 허락하시진 않으셨을 것 같기도 하고 또 딸이 좋아하는 사람이라 예뻐해 주셨을 것도 같고. 그런데 내 생각엔 여보 서울로 대학 안 보내셨을 것 같아. 보내도 장모님 따라서 보내고 혼자 자취는 안 시키셔서 지금처럼 여보 못 컸을 거 같기도 해. “

“하긴. 과잉보호 가능성이 아주 다분하지만 그래도 난 독립적인 여성이니까 맞서 싸웠을 거야. 우리가 동선이 안 겹치면 모를까, 동선이 겹치면 우리는 분명 9년 전 그때처럼 서로를 알아보긴 했을 거야. 그리고 아마 좋아했을 거야. 여보는 멋있으니까."

“고마워. 콩깍지 안 벗겨지도록 더 노력해야지.”

“무슨 콩깍지야 아. “

나는 창문을 내려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빠에 대한 기억과 생각 끝에는 항상 아빠의 영향력이 개입되었더라면이라는 질문이 늘 따라온다. 기억이라는 게 존재하기도 전부터 없던 아빠라 상상하기가 쉽진 않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사실 아빠에게 받은 사랑이 충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 없는 응석받이 막내딸로 컸을 수도 있고 결혼도 아빠가 정해주는 안전이 보장된 남자와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비슷한 가정환경이었을 테고 지금처럼 시댁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을 거란 나만의 억지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내가 한 선택에 대해 혼자 오롯이 책임지는 경험은 평생 못했을 수도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남편은 참 좋은 사람이다. 따뜻하고 영민해서 품격이 느껴지는 멋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나고 자란 시댁에서 왜 나는 자꾸만 상처를 받는지 참 아이러니하다. 나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우리나라 며느리라는 자리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지금 경제력 없는 나의 처지로 인한 열등감과 자격지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6년 경단녀에 시댁과 친정 모두 다른 지역에 살기에 대신 육아를 맡아줄 분들도 없을뿐더러 시터를 써가면서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기는 싫었다. 그래서 나는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경제력 없는 여자에서 벗어나고자 나를 더 거세게 몰아세웠고 아이가 유치원에 가 있는 시간 동안 파트타임을 뛰기 시작했다. 물류센터부터 홀서빙, 사무보조, 카페알바 닥치는 대로 했다. 옆 단지 아파트에서 새벽 우유배달도 했다. 사소하지만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 대한 불편감을 조금은 가라앉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갈등은 형님의 이혼과 재혼으로 또다시 드러났고 제주로 와서 경제력이 없어지니 바로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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